- 문화유산답사기

[경주/경주여행/경주고분여행]]누운소나무가 신비로운 신라 4대 왕,탈해왕릉

安永岩 2015. 1. 21. 11:28

 

 

경주 왕릉 중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있는 왕릉이다.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우회도로 옆에 있고 이정표도 아주 잘 보인다.

'석탈해왕릉'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는 왕릉으로 석(昔)씨왕의 시조 릉인 셈이다.

신라에는 3대성씨가 차례로 왕을 역임하였는데 이른바 박,석,김씨이다.

그런데 석씨가 이외의 성씨라서 의아할란지 몰라도 뼈대가 있는 성씨였네요

참고로 석씨왕은 제4대 석탈해로 부터 9,10,11,12,14,15,16대 석흘해왕을 끝으로

김씨 성으로 왕권이 넘어 갑니다.

석씨는  8왕으로 재위기간이 173년였다.

 

 

 

경주 탈해왕릉(慶州 脫解王陵)

사적 제 174호

 

이 릉은 신라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재위:서기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천리길 되는 다파나국(多婆那 :지금의 흑룡강 하류에 있던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으나 이는 불길한 일이라하여 궤속에 알과 보물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어 보냈는데,경주 양남면의 아진포(阿珍浦:현 나아리)에 닿았을때 수많은 까치들이 우짖는 곳을

따라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란 할머니가 알에서 깨어난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데려다 길렀다.

후일 기골과 지혜가 뛰어난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신라 2대 남해왕께서 청년을 입궐케하여 만나보니

과연 신체가 출중하고 학문과 예절이 뛰어난지라 이름을 물었으나 성명이 없다 하기에

"청년이 태어날 때 까치들이 울다가 날아 가고 남은 아기였으니

까치작(鵲)에서 새(烏)를 날려버리면 옛석(昔)자만 남으니 성은' 석'으로 하고,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났으니 이름은 탈해(脫解)로 함이 좋겠다."하시면서

성과 이름을 남해왕께서 친히 지어 주셨다고 한다.

탈해는 훗날 남해왕 맏딸 아효공주와 결혼을 하여 부마가 되었고,

신라 최고 관직인 대보(大寶 : 현 국무총리)의 직을 거쳐,

62세 때인 서기 57년 신라 4대 왕으로 등극하셨다.

치세는 23년이었다.

왕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 곳 성북(城北)의 양지바른 양정(壤井)언덕에 장사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릉은 높이 약 4.5m,지름 약15.5m이며,둥글게 흙을 쌓아 올렸다.

신라 초기의 릉은 모두 다 이러한 형태의 릉입니다.

크기가 차이가 날 뿐, 보편적인 일반적인 릉의 형태입니다.

삼릉,오릉,내물왕릉 등등... 경주 시내에 분포된 왕릉이 모두 이와 같죠

다만 봉황대처럼 봉분에 나무가 자라는 릉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그저 평범한 릉이지요

뒤에서 본 릉 모습입니다. 

 

 

 

탈해왕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자주 들렸다.

순전히 소나무가 좋아서였다.

누운 소나무가 신비롭기도 하고

하나 같이 릉을 향해 누운 소나무가 마치 제배하는 듯 하여

신기하기도 하고 나무의 수령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도 자태가 독특하고

지 자라고 싶은대로 자유자재로 자라는 모습이 보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가끔식 들리는 탈해왕릉입니다.

 

 

누운소나무

혹 넘어 질새라 기둥을 받쳐 놓았습니다.

절을 해도 너무 고개를 숙였네요

 

 

 

 

 

 

 

 

 

한무리의 일행들이 릉 가장자리를 돌아 산길로 들어 갑니다.

아마 소금강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포항에서 들어 오는 경주 입구 용강까지 연결된 소금강산행길이 부드럽지요

특히 소나무숲이 좋은 산길이지요

 

 

릉 앞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소나무

 

 

릉 앞에 연륜이 느껴지는 오래된 소나무와 누운 소나무들...

 

 

릉 우측에 자라고 있는 멋진 소나무들...

 

 

누운 소나무

잘 자라고 있네요

 

 

 

 

 

 

 

숭신전崇信殿

석탈해릉 입구에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져 있습니다.

 

 

 

 

숭신전(崇信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5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350-7

 

숭신전은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光武 2년(1898)에 군수이던 權尙文의 제안으로

석필복이 월성안에 지었다.그리고 광무 10년(1906) 숭신전으로 편액을 받았다.

그 후 1980년 석탈해 왕릉 옆인 지금의 위치로 옯겨서 지었다.

원래 자리인 월성안에는 돌로 만든 팔각형 기둥이 남아 있다.

홍살문 안쪽으로 영녕문(永寧門)과 경엄문(敬嚴門)을 지나면 숭신전이 있다.

숭신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겹처마맞배집이다.

왼쪽에 尙義齊,오란쪽에 象仁齊가 있다.

영녕문 밖에는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新羅昔脫解王碑銘'이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현지 안내문>

 

 

 

 

숭신전은 제법 크고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안은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굳게 문을 잠가 놓기 때문입니다.

 

 

'신라석탈해왕비명新羅昔脫解王碑銘'

 

 

 

참고로

경주에는 신라의 3성 시조임금을 모신 3殿이 있습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崇德殿(탑동,문화재자료 제254호),오릉 내에 있고

신라 4대 임금 석탈해의 崇信殿(동천동,문화재자료 제255호),탈해왕릉 옆에 있고

경주김씨의 시조 알지,문무왕,경순왕의 崇惠殿(황남동,문화재자료 제256호), 대릉원 옆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