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북/영주여행/영주꼭가볼만한곳]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安永岩 2015. 3. 1. 22:44

한국 정신문화의 창출지,민족교육의 산실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

 

 

 

소수서원(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영주가선비의 고장임을 드러내는 근거입니다.

소수서원이 수많은 서원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기 때문입니다.

사액서원은 나라에서 서원 이름을 지어 주고 현판을 내린 서원으로,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가한 교육기관(사립대학) 셈입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성리학(주자학) 비조로 추앙받는 회헌(晦軒) 안향(1243~1306) 기리고 있다.

안향은 고려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원나라에 가서 주자학을 들여와 우리나라에 보급한 최초의 주자학자이고,

주자학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는다.

공자의 학문이 남송의 주자(朱子) 계승되고, 주자학은 고려 안향이 우리나라에 전하고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됩니.

소수서원은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 풍기군수 시절인

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세우고,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1549 백운동서원을 국가 공식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자

사액을 요청하여 이듬해 최초의 사액서원이 것입니다.

 

 

 

우리 선조인 회헌 안향선생을 존중하지만

특히 제가 소수서원을 좋아 하는 것은 바로 학자수림(學者樹林) 즉 서원에 딸린 소나무 숲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앞을 흘러 내리는 죽계수와 어울린 풍경이 좋아서 입니다.

물론 서원으로서 단연 으뜸서원이면서 화려하지 않고 단촐하면서 빛 바랜 고색창연한 전각들이 좋습니다.

우리 영남에 대표되는 도산서원,병산서원,옥산서원,도동서원 등 하나 같이 제가 좋아 하는

명품 서원들입니다.

그 중 단연 으뜸 서원은 소수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의 입구 소나무 숲

일명 학자수學者樹라고 합니다.

 

 

 

겉과 속이 모두 붉다하여 적송이라 부르며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지요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릅니다.

 

 

 

학자수는 하나 같이 족보가 있습니다.

고유의 넘버를 달고 특별 관리되고 있습니다.

전 이것이 아주 마음에 들고 저를 안심하게 만듭니다.

소수서원의 학자수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서원들어 가기 전 솔밭 한켠에 있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당간지주입니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을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 않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크게 진입영역,제향영역,강학영역,유물전시관으로 나뉘는데

특이하게도 다른 서원에 없는 입구에 진입영역이 있습니다.

서원들어 가기 전의 밖의 풍경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저도 소수서원에 오면

서원 밖의 풍경을 오래토록 즐깁니다.

바로 영귀봉,학자수,소혼대,지도문,성생단,결렴정,죽계수 풍경을 말 합니다.

이제 그 풍경 하나 하나를 비교적 소상히 살펴 볼까 합니다.

소수서원을 여러번 왔지만 매번 수박 겉할듯이 보는둥 마는둥 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한번 세세히 볼까 합니다.

 

 

 

 

영귀봉靈龜峰

서원 앞 왼쪽에 있는 야트막한 둔덕에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고 합니다.

특히 수백년 된 적송들이 장관인데 바로 학자수라고 불립니다.

이 학자수들이 하나 같이 문성공묘를 행해 揖해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그 학자수를 세세히 만나 봅니다.

 

 

영귀봉으로 올라 갑니다.

 

 

 

소혼대(消魂臺)

작별의 정을 나눈 곳이라고 하는데

죽은자와 이별 현장인 것 같네요

 

 

 

그 주변에 수백년 된 듯한 적송들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서수서원 문성공묘입니다.

 

 

 

 

 

 

 

 

소혼대에서 본 죽계수 쪽 풍경

 

 

 

 

 

 

서원 좌측 담장옆으로 영귀봉에 오릅니다.

처음으로 올라 봅니다.

서원의 정경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서원 담장과 서원옆 영귀봉오르는 길

출입금지구역은 아닌 것 같네요

길이 나 있는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조심스럽게 조용히 올라 갑니다.

바로 옆이 문성공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수림이 대단합니다.

 

 

 

 

조오기 꼭데기까지만 올라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풍경을 봅니다.

여기도 소나무가 좋습니다.

 

 

 

소수서원 전경

 

비교적 단촐한 서원입니다.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고 다만 서원의 소중한 본래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래도 이 학교(한국 최초 사립대학교)에서 퇴계 선생의 제자 대부분을 포함하여

4천여명의 유생들을 길러 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서원 뒤 편으로 최근에 세운 '선비촌'입니다.

 

 

 

현재 소수서원에는 맨 앞에 있는 강학당은 보수 중에 있습니다.

 

 

 

오래 토록 머무르고 싶은 소나무 숲입니다.

이른바 영귀봉 학자수림입니다.

 

 

 

특이한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꽈리를 튼 모양으로 자라는데 신비롭습니다. 

 

 

 

 

 

문성공묘을 향해 일제히 제배하는 소나무들...

 

 

 

 

회헌 안향선생님의 무한한 존경심에 소나무마저 고개를 숙여 절합니다.

 

 

 

전 이 신비로운 자연 현상을 보고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입니다.

영월 장릉(단종묘) 주변의 소나무들이 이와 같이 릉을 향해 절을 한다고는 들어도

같은 현상이 이 곳 소수서원 문성공묘에도...

 

 

 

 

5백년은 족히 되고도 남을 수령의 소나무도 문성공을 향해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귀봉을 내려와 강가로 갑니다.

바로 취한대와 경렴정,또한 유명한 자 바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 흐르는 계곡이 죽계수입니다.

소수서원하면 문성공묘,학자수,경렴정,敬자 바위에 얽힌 한많은 사연들이 대표될 것입니다.

소수서원의 건물들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소수서원에 얽힌 하나 하나의 사연들이 바로 서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역사를 만나려 갑니다.

 

 

취한대(翠寒臺)

퇴계 이항 선생 명명,'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취(聚)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와서 명명하였으며

서원 경관을 죽계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번갈아 보면 느낌이 남다를 것입니다.

 

 

죽계를 바라보고 선 소나무들...

 

 

 

 

백운동(白雲洞) 경()자 바위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운동과 붉은 색의 경(敬)자는 신재 주세봉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경자는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입니다.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영주 순흥 사람들은'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어

그때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리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피끝"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참화 때 희생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 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봉 선생이 각(刻)한 글씨에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 온다.

 

*정축지변(丁丑之變) :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임금(노산군)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자,세조 3년인 1457년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반대하여,

이 곳 영주 순흥으로 유배와 단종복위운동을 펴다 사전 탄로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고을도 폐부가 된 사건

 

 

 

경렴정(景濂亭)

신재 주세봉 창건,서원담밖,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입니다.

정자 정면의경렴정행서 현판글씨는 주세붕이 직접 글씨로 전하고

정자 이름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추모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정자 안에 걸린경렴정초서 현판글씨는 김구, 양사언과 함께 ‘3 초성(草聖)’으로 불린 고산(孤山) 황기로가

퇴계의 요청에 따라 글씨라고 한다.

 

청렴정 안에 걸린 초서 현판글씨는

초서의 대가 孤山 黃嗜老가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는 경렴정 현판 글씨입니다.

 

 

 

경렴정 안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詩가 빼곡히 걸려 있습니다.

 

 

 

 

 

 

 

경렴정 옆으로 죽계계곡으로 내려 가는 길입니다.

보이는 연못은 죽계 옆에 탁청지입니다.

서원 밖의 풍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서원 정문인 志道門 앞 잔디 제단은 성생단(省牲壇)입니다.

매년 봄,가을에 安珦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죽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입니다.

 

 

이제 서원 안으로 들어 가보겠습니다.

먼저 강학당(보물 제1403호)과 마주하는데 현재 보수중입니다.

서원 안에는 특이하게도 제향영역이 서편에.강학영역은 동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보통 서원은 前學後廟형태인데 여기는 굳이 말하자면 東學西廟형태입니다.

먼저 제향영역을 살핍니다.

제향영역은 문성공묘,전사청,영정각이 있습니다.

 

 

 

 

 

문성공묘,뒤에 전사청,맨 우측에 진영각이 있고 진영각 앞에 장서각이 있습니다

 

강학당(講學堂)과 문성공묘(文成公廟)의 배치도

서원에는  학교기능의 강학당과 제사기능의 사당이 있습니다.

중국식은 前學後廟라 해서 학교를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우는 것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이 이 방식을 따랐지만

소수서원은 東學西廟로서 동쪽에는 학교를, 서쪽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입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보물 제1402호)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주세봉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습니다.

 

현판문성공묘 글씨는 주자(주희) 후손인 주지번(朱之蕃) 썼다. 명필로 소문난 명나라 주지번이 1606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성균관의명륜당(明倫堂)’ 현판 글씨를 , 소수서원에도 들러 참배하고 글씨를 남겼다문성공묘현판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사(祠)는 일반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묘(廟)는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격이 높은 國父격 인물을 모신곳을 말하는데 안향 선생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정료대(庭燎臺)와 관세대(盥洗臺)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습니다.

관세대는 서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 놓는 받침돌입니다.

 

 

일영대(日影臺)

해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맑은 날,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합니다.

 

 

 

 

 

영정각(影幀閣)에 모셔져 있는 영정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회헌 안향초상(국보 제111호)과 신재 주세봉초상(보물 제717호)외에

회암 주자,오리 이원익,한음 이덕형,미수 허목의 초상을 봉안한 곳입니다.

 

 

회암 주자,회헌 안향

 

 

신재 주세봉,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오리 이원익

 

 

회헌 안향선생 초상

(국보 제111호)

 

 

 

 

 

 

명종임금 어필 편액'紹修書院'

 

풍기군수 주세붕은 1542 숙수사 절터에 안향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마련하고,

이듬해 사당 옆에 백운동서원을 건립해 입학생 3명을 가르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곳은 안향이 청소년 시절 학문을 닦았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1501~70) 풍기군수로 부임한 새로운 교육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

서원을 공인하게 하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1549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지원을 나라에 요청했다.

주자가 강론하던 중국의 백록동서원의 사례를 본받으려 것이다.

명종은 이듬해인 1550(명종 5) 퇴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원 명칭을소수서원이라 짓게 하고

친히 편액글씨를 써서 하사했다. 그리고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내려주었다.

사액이란 말은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준다는 의미다

명칭은 당시 대제학 신광한이 지어올린 것을 명종이 윤허한 것으로,

소수(紹修)’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 뜻이다.
글씨는 소년의 글씨처럼 조심스럽고 방정한 해서다.

실제 글씨를 명종(1534~1567) 당시 나이는 16세로, 어린 시절이었다.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되어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글자는 양각하고 금칠을 하였다.

(우측 상단 모서리)에는 명종 친필이라는 의미의명묘어필(明廟御筆)’이라는

글씨를 세로로 새기고 호분(胡粉) 칠했다.

좌측에는가정 29(嘉靖二十九年: 1550) 4(四月) () 선사(宣賜: 임금이 하사하다)’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사방에 두른 테두리에는 청색 바탕칠에 분홍색 연꽃, 초록색 등의 문양을 넣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테두리 모서리는 철판을 덧대어 보호하고 있다.

소수서원 현판은 왕이 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한 현판이고,

최초의 사액서원 현판인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화재다.

2001 11월에 경북도유형문화재 330호로 지정된

소수서원 현판 원본은 소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장서각(藏書閣)

오늘날 대학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하사하신 '어제 내사본'를 비롯 많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입니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입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한 건물로 되어 있고 정면6칸,측면1칸반의 팔작지붕양식입니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

역시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입니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별도 건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정면3칸,측면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그런데 4곳에 학생들이 차등하여 유숙하였다고 합니다.

즉 일신재기(1804년 원장이던 성언근 지음)에 따르면 '대개 학자의 공부는 마땅히 독서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至樂齋가 맨 아래에 있고,독서를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는 학문을 하기 때문에 學求齋가 그 오른쪽에 있고,학문을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日新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고,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敬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고 義로 외면을 방정하게 하기 때문에 直方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게 되었다.

직방재가 된 뒤에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게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明倫堂이 직방재 앞에 있는 것이다.'

 

 

 

 

사료관을 생락하고 서원 뒷편으로 나가서 죽계천를 건너 광풍정으로 갑니다. 

 

 

 

서원 밖 동편으로 죽계천을 건너면 경치가 좋은 곳에 광풍정(光風亭)과 광풍대(光風臺)가 있습니다.

광풍대는 퇴계 이황선생이 命名하였고, 광풍정은 4각 정자로 2002년에 세웠으며

앞에는 죽계가 감아 돌고 뒤로는 연화산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광풍정에서 본 죽계 풍경

 

 

 

 

 

 

 

 

 

연화산 기슭에 소수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해서 선비촌으로도 갑니다.

시간관계상 들리지 못하고 계곡을 거슬러 취한대로 내려 갑니다.

 

 

죽계(竹溪)

풍치절경의 죽계水가 맑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7년 전, 1457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영주 순흥 사람들이

정축지변으로 참화를 당하여 피로 얼룩졌다고 하는 바로 그 죽계입니다. 

역사는 흐릅니다.그것을 생생히 증언하는 곳에 제가 섰습니다.

우리 순흥 安門도 몰살 당한그 피의  현장입니다.

지금 포항 구룡포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피의 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나와 자리잡은 곳입니다.

이웃한 영의정 황보 인 후손도 겨우 못숨을 부지한 손자를 여종이 데리고 몰래 도망와서 자리 잡은 곳도 구룡포 성동리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安門과 황보씨는 수양대군(세조)에게 잔혹한 참화를 당한 성씨이지만 그 때 어데 안 당한 성씨가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서슬이 퍼렸던 때였으니까~

 

 

 

 

소수서원 건너편에 위치한  취한대로 갑니다.

 

 

 

죽계수

 

 

 

취한대翠寒臺

 

 

 

서원경관을 竹溪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번갈아 보면 느낌이 다릅니다.

여기서 보고,저기서 보고...

경치가 참으로 좋습니다.

 

 

 

 

 

죽계를 앞에 두고 자리 잡은 취한대 주변의 풍경이 좋아 쉽사리 자리를 떠나질 못합니다.

 

 

 

 

 

 

 

 

죽계을 건너 다시 서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날씨가 우중충한 추운 날씨지만 가족나들이객들이 많이 보입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들...

언제보아도 좋습니다.

오늘 소수서원을 방문한 첫째가 바로 이 소나무였습니다.

언제 다시 또 올 때 소나무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겠지요

 

 

이제 소수서원을 떠납니다.

가까이에 있는 부석사로 갈까 합니다.

영주는 유명한 소백산 아래에 명승고적이 많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그 첫 손이 소수서원이지요

그 다음에 부석사,그 부석사를 찾아 갑니다.

 

 

 

소수서원 학자수도 안녕입니다.

내 생애 또 몇 번이나 올란가 몰라도 오늘은 느낌이 남다릅니다.

그 학자수 하나 하나를 눈에 넣고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