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영월여행]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육지 속의 작은 섬,청령포

安永岩 2015. 7. 5. 09:31

울창한 송림과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육지 속의 작은 섬,

청령포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 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17세 단종은 외부와 단절된 채 적막강산 이 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의 애절하고 비통했던 심정을 그의 자규詩에도 잘 표현되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청령포주차장과 영월강변저류지홍보관(옥상은 전망대)

 

우리가 묵었던 숙소와 가까워 좀 일찍 청령포에 도착한 우리는 아직 매표가 되지를 않아 (9시 매표)

청령포 전망대에 올라 청령포를 바라 보면서 회상에 잠깁니다.

누군가는 영월에 가면 매번 들린다고 하는데 나는 오래전에 한번 들린 청령포의 추억이 마물가물합니다

그 때는 그저 좁은 도로변에 보잘 것 없는 나룻배를 타고 들어 갔던 것 같다.

지금은 도로도 잘 정비되었고 무엇보다도 성역화된 청령포가 몰라 보게 달라 졌네요.

 

 

 

홍보관 옥상은 훌륭한 전망대역활을 합니다.

청령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아무리 봐도 귀가 막히는 천혜의 감옥같은 요새입니다.

저 육지 속의 작은섬에서 밤이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모두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듯 합니다.

 

 

 

 

나룻배가 아닌 통통배를 타려 내려 가는 강변엔 붉은토끼풀이 활짝피어 길손을 반겨 줍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청령포에 도착하여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 가고 있는 우리 회원들,

처음 여기에 당도한 17세 단종의 심정이 어때쓸까?

활짝 핀 황색코스모스가 우리 일행들을 맞아 줍니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슬픈역사보다도 울창한 소나무들입니다.

청령포의 소나무는 특히 유명한데 원래 소나무를 좋아 하는 나는 청령포의 솔숲이 보고 싶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巨松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어소(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의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습니다.

 

 

 

입구에서 좌측은 단종어소,우측은 금표비,노산대

청령포내의 솔숲을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 보면 어짜피 다 보게 됩니다.

편하게 솔향을 맡으면서 천천히 돌아 보시면 됩니다.

 

 

금표비 와 관음송으로 곧장 가는길

 

 

 

 

우린 당종어소로 해서 둥글게 한바퀴 돌아 봅니다.

단종어소,관음송,망향탑,전망대,노산대,금표비順으로...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당시 17세)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습니다.

 

 

당종어소를 둘러보고 있는 우리 회원들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문종(단종의 아버지)이 일찍 승하하지 않고 10여 년을 더 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되었을까?

성년이 된 단종은 아마 성군이 되었을 것이고, 세조 한명회가 없었고 폭군 연산군도 없을 것이다.

또한 피비릿내 났던 계유정난도,무고한 옥사도 일어나지 않은 태평성대의 세월이였을 것이다.

그랬으며 한명회도 그저 그런 경복궁궁지기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다 죽었을 것이다.

-안영암생각.

 

 

 

단종

 

 

 

 

문안인사

행랑채

 

 


궁녀


 

밀랍인형으로 잘 표현 해놓았네요

 

 

 

물론 단종어소와 행랑채는 승정원일기에 따라 근세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청령포 솔숲

 

 

관음송가면서 본 단종어소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단다.

장남(문종)의 첫 손자로 어릴 때 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어질고 성군의 자질을 타고 난 손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꼬?

문제는 문종의 허약한 건강때문에 일찍 죽을 것이라고 예상한 세종대왕은 믿었던 고명대신들에게 어린 세손의 장래를 부탁하게 된다.

그것이 문제였다.홍위(단종의 아명)가 10세 때 할아버지(세종)가 승하 하고,12세 때 아버지(문종)마저 승하 하고, 12세 어린나이에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 많은 대군들이 어린조카를 가만 놔 두었겠는가?  

세종이나 문종이나 같이 나누어서 10여년을 더 살았드라면...하기사 문종은 세자 세월을 30여년을 했었으니 무리였을까?

아마 역사는 확실히 달라 졌을 것이다.

-영암생각.

 

 

관음송 주변

 

 

관음송

 

 

청령포에서 가장 상징적인 관음송입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 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는 600년 生의 소나무입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답니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이 자랐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관리 되고 있습니다.

 

관음송 상부모습

 

 

노산대가는길에 소나무 기둥

 

 

노산대(魯山臺)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무렵

이 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눈물로 헤어진 마누라(정순왕후)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노산대에서 본 청령포 절벽지대

 

 

노산대에서 좀 더 위로 올라 가면 만나는 망향탑

 

청령포 뒷산 육육본(六六峯)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입니다. 

 

 

 

망향탑에서 본 절벽 암벽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두운 시절에

어떻게 이런 천혜의 절벽지대를 유배지로 골랐을까?

일설에 신숙주가 세조에게 추천했다고 합니다.

 

 

 

노산대에서 본 관음송 주변 소나무 숲

 

 

의미있는 최근 돌탑

이 곳을 방문한 탐방객들이 단종을 생각하면서 한돌 한돌 올려 쌓은 탑입니다.

 

 

 

금표비(禁標碑)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은 접근금지 표지석이다.

 

즉 유배된 단종에게 엄격히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지요.

혹시 있을지 모를 추종세력들의 왕위복위 운동을 사전에 막자는 취지였을 겁니다.

당시에는 상왕복위운동이 여기저기 대세였을 때였으니까

그만큼 민심이 어린 단종에게 가 있었다.

-영암생각.

 

 

 

 

뒷면에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승정구십구년』이라 음각되어 있는

이 뜻은 동서로 300尺 남북으로 490尺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숭정99년

이라는 내용으로,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제 청령포를 떠납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던 청령포였습니다.

이 다음에는 어떤 계절에 또 누구와 와 질랑가는 몰라도 또 올 것이다.

오고 또 오고~그래야 단종이 덜 외롭지...

죽어서 그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다시 한번 더...청령포

 

 

 

 

 

우리 회원들

 

 

☞ 청령포주차장: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241

해설문의안내:☏033-374-1317

매표소☏033-372-1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