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일 이틀간에 많은 비가 내렸다.
옥산서원앞과 독락당옆에 도덕산과 어래산에서 흘러 내리는
비의 량이 많아 폭포와 계곡의 물이 많을 것 같아 길을 나셨다.
예상대로 폭포는 장관였고,독락당 계정앞 계곡의 물이 넘칠 듯이
흘러 내리는데 푸른 녹음과 함께 잘 어울렸다.
근래에 이렇게 물이 많이 흘러 내린 것이 얼마 만인가?
월요일(2010,7,12)이라 조용했지만 독락당 들어 가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들어 갈 수 없어 유감였다.
항상 잠겨 있다는 사실을 여기와서 주민 애기를 듣고 알았다.
특별한날 아니면 열지를 않는단다.
그 특별한 날은 관에서 나오든지, 취재차 온다든지,사전에 약속이
되어야 한다나...그 후손들이 관리 하는데 아예 잠가 놓으니 문제로다.
평소에 공개하여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리는게 도리 아닐까?
獨樂堂을 더욱 빛나게 하는 정자 '溪亭'
솟을대문
솟을대문을 통하면 나타나는 '경천재' 이렇게 적어 났다.
경천재(敬淸齋)
본 고택은 1601년(선조34년) 3월 12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 휘(諱),준(浚)과 순(淳).
두형제가 옥산별업(玉山別業)을 봉수(奉守)하기 위해 화의문(和議文)을 작성하면서
세운집이다.선생은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백리에 가자(加資)되었다.
청백은 공경지심(恭敬之心)에 나온다하여 후손들이 본 집을 경천재(敬淸齋)라
이름하였는데,1900년 이후 머슴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화의문약설(和義文略說)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외 유택(遺澤)에는 우리 부모(휘:전인,호:잠개)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독락당 들어가는문 ,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계정가는 돌담길
계정가는길
계정(溪亭)
도덕산과 봉좌산,그리고 어래산에서 내려 오는 계곡 하류에
이런 멋진 곳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을
회재 이언적은 과연 누군가?
이언적 (조선 성리학자) [李彦迪]
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비온 뒤라 계정앞에 수량이 풍부하다.
계정(溪亭)
독락당 뒷편 계곡쪽에 지은 정자인데 달린 방은 仁智軒,
왼쪽 살창 상부에 '溪亭'편액이 있다. 계정사이의 방을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암자의 名을 붙일 정도로
은둔해서 살면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 양진암 편액도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溪亭 편액은 한석봉 글씨란다.
그리고 보면 회재 이언적과 교류한 사람들은
당대 내로라하는 대학자들인 셈이다.
이 옥산서원과 독락당에서 이들이 교류하면서
사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계정을 마주 보고 있는 계곡 건너 숲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 413 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선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27년(1532)에 지은 이 건물은 일명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溪亭)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들어갈 수 없어 현판글씨를 완전히 찍지 못했다.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란다.
독락당 모습인데 안에 현판은 '獨樂堂', 밖에 편액은 '玉山精舍'
옥산정사의 편액은 퇴계 이황의 글씨
독락당 마당
독락당과 기와 담장
약쑥밭
이약쑥밭은 1553년(명종8년)에 회재선생의 아들 全仁이
강계(江界) 적소에서 회재선생을 시측(侍惻)하고
갖고온 중국산 약쑥인데
지금은 국내 약쑥과 혼선이 되어 자라고 있다.
계정에서 본 독락당
독락당 옆 담장 중간에 독락당에서 계곡 물을 보기 위해 설치 해 놓은 쪽문.
독락당 담장에 담쟁이 덩굴이 멋스럽게 자라고 있다.
큰 나무는 향나무인데 세월을 말하다.
중국 주엽나무(조각자 나무) 천년기념물 제115호
수령이 약 470년 추정,높이 14.5m 둘레 4.9m이 나무는 중종27년(1512)에
회재 이언적이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할 때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 부터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전해 온다.
조각자 나무
회재유물관
바깥 담장
독락당 옆 멋진 숲
△▽ 옥산서원 쪽 '용추'
마침 비가 80mm 이상 온 뒤라
용추에 소용돌이 치면
쏱쏟아 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사실 이 모습을 볼려고 왔던게 아닌가?
옥산서원 과 독락당을 이어 주는 나무다리
옥산서원 앞 계곡.
평소에 졸졸 흘러 내리는데 오늘은 파도가 치듯이 내리 쏟는다.
<20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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