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일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만 개방하는 절집,문경 희양산 봉암사

安永岩 2014. 5. 9. 16:12

 

봉암사 경내에 걸린 백등

 

내가 아는 문경 봉암사는 성철스님의 결사도량,일반인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비밀의 절집,

우리나라 유일의 청정수행원,희양산(曦陽山)의 하얀 화강암 봉우리 아래에 내려 앉은 절집...정도이다.

그런 희양산 봉암사지만 나에게는 지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봉암사입니다.

그 추억은 나중에 애기하기로 하고 2014년 부처님 오신날(5/6) 새벽 2시 10분에 봉암사입구에

도착하여 나의 애마(산타폐) 침낭속에서 내일 봉암사의 부처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며 단잠을 잡니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이미 밖은 환합니다.

차문을 열고 밖을 나오니 차가운 기온에 또 놀랍니다.

아뿔사 ! 산속인 것을 잊고 옷을 얄게 입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우짭니까? 하는 수 없지요

새벽 찬공기를 마시며 계곡에 내려 서니 희양산 흰암봉에 아침햇살이 비칩니다.

계곡은 희양산계곡 혹은 백운계곡입니다.

백운계곡의 아름다움을 따로 올리겠습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는 그집 그길 그대로 인것 갔습니다.

희양산정상에서 길을 잘못들어 흰암벽을 타고 내려 오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쏟아져

추락의 위험을 느끼고 빽하여 이 곳 봉암사쪽으로 하산을 하였는데 그만 봉암사에서 나와 지키던 스님에게

발각되어 봉암사 경내로 잡혀 들어가서 5일 교육받고 풀어 준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 집에서 빗속애 먹은 따끈따끈했던 라면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좋지 않았던 추억이라 따로 뒤에 기술할께요

우째거나 유명한 절짐앞 치고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민간인출입금지구역이다 보니 찾아 오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발전이 없는 것이지요

 

승객버스종착점입니다.

물론 절집 옆에 주차장이 있지만 사찰관련 차량만 허가 받아 출입합니다.

 

 

 


입구에 비치된 출입금지 안내문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마을 주민까지도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절집입니다.


입구에 비치된 안내문이 사못 위협적입니다.

나는 당해 본 당사자로서 그날의 악몽이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봉암사가 산문을 끌어 잠근날이 1982년 6월9일이네요

우리 산악회(구룡포산악회)가 1982년 6월12일에 창립되었으니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였습니다.

참으로 세월이 많이 흘렸습니다.

 

 

올라가면서 본 희양산의 위압적인 암봉모습입니다.

그 앞은 구왕봉입니다.

그 사이 재가 지름티재이지요

충북 연풍에서 문경으로 넘어 오는 재이고 봉암사앞을 지납니다.

물론 지금은 출입금지구역입니다.

절대로 넘어 오면 안됩니다.

절집뒤에서 스님들이 길을 막으면서 오던길을 다시 올라가라고 하지요

절대로 통과시키주지 않습니다.

 

 

曦(햇빛희)陽(볕양)山 鳳巖寺 일주문

그런데 희양산의 뜻을 알 것 같지요.햇빛이 드는 흰산이란 뜻으로 해석하모 될까요?

아닌게 아니라 희양산은 햇빛이 들면 거대한 하얀 암봉이 더욱 더 희게 보입니다.

 

 

일주문을 벗어나 조금 더 들어 가면 길 양옆으로 세워진 암석문으로 들어 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드디어 봉암사 들어 가는 입구 침류교입니다.

좌측에 龍秋洞天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 바로 올라 가면 백운계곡인데 그 경치가 과히 선경이지요

따로 올리겠습니다.

 

 

남훈루南薰樓

 

 

침류교를 지나 들어 가면 마주하는 남훈루입니다.

건물이 자못 웅장합니다.

통과하면 바로 대웅전입니다.

남훈루 앞 공간이 넓고 탁 트여서 좋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연등접수가 수월합니다.

뒤에 보이는 거대한 흰 암봉이 바로 희양산 정상입니다.

올라 보면 주변 조망이 참으로 좋고 분재같은 소나무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문득 다시 가고 싶네요.~ㅎ

 

 

연등을 접수하고 직접 주소,우리 가족 이름을 쓰고

 

 

 

직접 풀칠하여 연등에 붙입니다.

이날 만큼은 봉암사 스님을 마음껏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신도들과 함께 어울러서 다니고 부딕낍니다.

봉암사스님들은 평소에 엄한계율에 따라서 생활합니다.

특히 봉암사는 1940년대에 우리나라 불교개혁을 외친 결사도량으로써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조계종특별수도원으로써 밥먹고 울력(공동노동)하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수도정진하는 곳입니다.

몇 십년째 수도만 하는 스님도 많다고 합니다.

 

 

 

봉암사백등입니다.

백등을 다는 이유로는 수도정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언제 색색의 연잎을 만듭니까?

해서 백등을 단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영가를 위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차별없이 밝히기를 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늠늠한 남훈루 뒤로 보이는 암봉은 구왕봉입니다.

희양산과 한 능선상에 있는 봉우리이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입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은 조용합니다.

오늘따라 구름 한점없는 파란하늘이 부처님 오신날을 축복하는 듯 합니다.

봉암사 경내를 구경하는 동안 따스한 햇살이 추운 기운을 앗아 갑니다.

 

 

대웅전 뒤로 희양산 힌 암봉이 늠늠란 자태로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대웅전으로 갑니다.

대웅전으로 저마다 소원을 적은 백등을 들고 올라 갑니다.

저도 같이 올라 갑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저마다 원하는 위치에 백등을 답니다.

대웅전 앞부터 채워져 옵니다.

미리 걸어 놓은 백등이 아니고 초파일 당일 백등을 하나하나 달아 점차 채워 가네요.

제가 달 때는 아직 새벽이다 보니 반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백등입니다.

며뉼아가와 우리 서균이까지 이름을 올립니다.

 

 

 

 

그리고 대웅전 정면 하늘 높이 손수 답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소원합니다.

 

 

 

대웅보전(대웅전)앞에 걸린 백등

 

 

 

 

 

저마다 한개 두개...심지어 5,6개씩을 들고 와서 답니다.

 

 

 

달아 놓은 백등을 확인하고 사진도 찍고~합니다.

 

 

순식간에 대웅전 마당에 백등이 찹니다.

나올 때 쯤에(9:30분) 거의 다 차는 것을 보고 나왔습니다.

 

작은 키에 백등을 다는 모녀인 듯한 모습이 정겹습니다. 

 

달린 나의 소원 백등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사진을 찍습니다.

 

이렇게 대웅전 마당에 백등이 거의 滿燈입니다.

대웅전이 차면 금색전 앞에 걸린 줄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색전 마당에는 아직도 쳐진 줄만이 백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에 건물은 남훈루의 뒷모습입니다.

봉암사와 백등 !

수행에만 정진하는 사찰에 참으로 어울리는 백등입니다.

한개만 봤을 때는 다소 실망스럽지만 이렇게 무리를 지은 모습을 보니 

오히려 장관입니다.

일부러 봉암사의 백등을 볼려고 천리 먼길을 온다고 하지요

 

 

대웅전 앞에 검소하게 차려진 관불의식(灌佛儀式 , 부처님 목욕)

 

관불의식(灌佛儀式,)은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의식으로,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바니 동산을 상징하는 화단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그 가운데 부처님의 탄생 조각상을 안치한 뒤 작은 표주박으로 감로수를 떠서 부처님 정수리에 붓는 것입니다.

불교의 의례 가운데 관불의식은 부처에 대한 공경을 표시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히 하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의식입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신도 및 일반 참배객들 모습

저도 정성모아 부처님전에 엎드려 9拜 올립니다.

 

  

 

이제 대웅전 우측 극락전으로 갑니다.

극락전은 특이한 건물 생김새가 눈길을 끕니다.

 

봉암사는 우리나라의 으뜸 사찰이면서 절집 전각이 의외로 간단합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5,6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대웅전에 닿는데 봉암사는 일주문,남훈루를 통과하면 바로 대웅전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전각도 없습니다.극락전,산신각,조사전,금색전,그리고 스님들이 기도 정진하는 선원,요사채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30여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깨끗한 자연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계곡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 얼마나 신선하게 와 닿는지 그저 놀랄 뿐이고 감탄합니다.

봉암사에 오면 반드시 참배하고 가는  극락전입니다.

 

  

 

 

극락전으로 해서 대웅전으로 가기도 합니다.

 

보물 제1574호인 문경 봉암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정면 1칸,측면 1칸 중층 겹치마 모임지붕의 목탑식 건물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敬順王이 이 곳에 피난하여 원당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건물은 당초의 건무로 보기는 어려우나 기단 및 하층 처마는 특이한 구조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목탑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부처님

 

 

 

극락전 아래 요사채

봉암사는 요사채건물들이 비교적 최근에 세우고 크기도 큽니다.

그것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스님들의 수도정진을 위한 방이 많이 필요하다 보니

크게 지은 듯 합니다.대신 웅장하지는 않고 검소합니다.

한번에 몇 백명을 수용할려고 하면 크게 지어야 하지요.

그 옛날 우리가 절에 잡혀 갈 때 쏱아져 나온 선승들이 족히 5~60명은 됩디다.

죽는 줄 알았지요

기도를 방해한 것은 아니였는데 다 내려 왔는데 못내려 가게 하고 왔던 길을 다시 올라 가라고 하니

욕이 나오고 분위기가 험악해졌지요.그래도 스님에게 욕까지는 지나졌지요.제가 한게 아니고 우리 회원중에 한사람이~

숫적으로 중과부족입디다.

 

  

남훈루 뒷 모습

 

 

봉암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하얗철쭉입니다.

희양산의 하앟 암봉,백등,그리고 하얗철쭉이 봉암사를 상징하는 色같습니다.

오로지 부처가 되고자 기도에 정진하는 禪僧의 요람 봉암사입니다.

 

 

 

극락전 야생화

 

 

 

 

 

 

 

 

 

 

 

지증대사사리탑과 탑비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대웅전 좌측에 있습니다.


 

대웅전 앞 백등을 또 보고~

저의 백등은 한가운데 쯤에 있습니다.

파란하늘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백등입니다.

 

 

봉암사에서 반드시 보고 가는 지증대사사리탑과 碑입니다.

 

 

좌측에 탑비이고 우측은 사리탑입니다.

탑비는 국보이고 사리탑은 보물입니다.

 

 앞

 

 뒤

 

봉암사 지증대사탑(智證大師塔)

보물 제137호

이 탑에는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의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이 탑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8년(882)에 세워졌으며,여러 장의 板石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부의 장식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탑의 높이는 3.41m,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입니다.

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 당당한 모습에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숙연해짐을 느낀다.

 

지증대사는 경주김씨로 17세에 부석사 경의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로 들어와

이듬해인 동왕 8년(882) 향년 5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지증,탑호는 적조라 내렸다.  

 

 

 

 

 하

 

 상

지붕


 

 

봉암사 지증대사탑비(鳳巖寺 智證大師塔碑)

국보 제315호

 

이 碑는 신라말 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景哀王 원년(924)에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釋慧江이 썼다.

 

 

                    귀부(龜趺)와 이수(용모양의 비머리)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두는 한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 형으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이다.

 

 

할미꽃은 지고 할미꽃이 백발이 되었네~ㅎ

 

 

이제 금색전金色殿으로 갑니다.

 

 

지증대사사리탑과 탑비로 가는길에 하얗철쭉이 눈부십니다.

 

 

 

 

금색전金色殿

 

금색전은 뒤에 大雄殿의 현판이 붙어 있고 앞에는 金色殿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금색인을 모시는 집 즉 부처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금색전 앞에도 백등을 달기 위한 줄이 처져 있습니다.

아직은 달리지 않았지만 곧 백등으로 꽉 찰 것입니다.

10시경에 나가면서 보니 봉암사에 들어 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입디다.

대형버스 몇 대가 쉴세없이 부지런히 참배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버스를 타기 위한 줄이 장난이 아닙니다.

더구나 차는 들어 오는 대로 길가에 세우다 보니 걸어서 버스 타는데까지도 만만찮은 거리입니다.

저는 미리 알고 새벽 2시 10분경에 봉암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잠을 자는 바람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은 시내 전 경찰이 출동하여 통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유명세를 타는 봉암사입니다.

일년에 딱~하루,부처님 오신날만 개방하다 보니 천리길 마다 않고 오는 것 같습니다.

 

   

봉암사 삼층석탑

보물 제169호

금색전 뒤로 희양산의 하얗 암봉이 더욱 더 또렸하게 다가 옵니다.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이탑의 조성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정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3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희양봉의 장중하고 힘찬

 기상이 휘몰아쳐 내려오다가 삼층석탑에 이르면 마치 영웅의 기개도 단아한 우아함 앞에서는 그 수줍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용트림으로 뻗어오던 기개는 일순 탑 앞에서 주춤하며 부드럽게 순화되어 부드러움과 굳셈의 절묘한 조화로 찹배객의 발길을 묶는다.

 

 

 

금색전 앞 요사채

길다란 마루에 앉아서 금색전과 뒤 배경인 희양산의 흰 암봉의 절묘한 조화의 아름다움을 즐깁니다.

 

 

뒤에 보이는 또 다른 암봉 구왕봉입니다.

금색전 마당에 걸린 백등과 하얗철쭉의 조화를 보지 못하고 내려 와서 못내 아쉽습니다.

언제 또 시간이 되면 오후 늦은 시간에 찾아 저녁 봉축연등행사까지 보고 와야 겠습니다.

다만 백등을 직접 당일 날 손수 달기 때문에 안에 등이 없습니다.

즉 불을 밝힐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찰내 간접조명으로 비출 것 같은데...어떤 모습일까요?

그것도 궁금합니다.

 

 

 

 

안을 들어 갈 수 없는 희양산문태고선원입니다.

 

 

웅장한 모습의 희양산 정상 암봉입니다.

쳐다 보니 옛날 생각이 어제일 같이 떠오릅니다.

희양산의 안좋은 추억 하나,

희양산등산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2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1987년 어느 봄날,구룡포산악회(1982년 6월12일 창립)회원 30여명은 희양산을 산행하기 위해 희양산을 찿는다.

그 때도 희양산은 입산금지구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북 연풍 은티마을에서 지름티재를 걸쳐 정상을 갔다가 정상 북쪽 능선을 타고

가은 원북리 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로 계획하고(지금도 희양산은 이 코스로 산행을 함) 등반을 하였는데 불길한 징조였는가?

지름티재에서 희양산가는 암벽구간을 통과하다가 김상호대원이 무전기를 놓치는 바람에 절벽아래로 떨어진 무전기를 건질려고

자일을 타고 내려 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올라왔다(그 당시에는 무전기를 사용하였는데 그 무전기도 무선국에 등록을 하고 사용하였다.

간첩이 날 뛰던 세월였으니까 당연히 통신규제가 심했다.무전기 사용 허가요건이 등산용였기 때문에 그 외 용도로 쓰면 당연히 경고처분이

내려졌다.실제로 무전기로 등산중에 말장난을 친 날은 다음날 바로 무선국에서 경고가 날아 들어 애를 먹었었다.)

그 당시 김상호대원은 히말리아 알륭캉원정을 다녀올 정도로 등산베테랑였는데 그도 그만 실수로 무전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째거나 희양산 정상에 올라 셨는데 그만 돌풍과 함께 비가 쏟아 졌다.

사방은 캄캄해지고 돌풍에 비까지 쏟아 지니 적잖히 당황을 하여 우왕좌왕 하는 통에 하산길을 놓쳐서 내려 선다는게 뭔가 이상했다.

내려 갈 수록 길은 나오지 않고 계속 암봉의 연속이고 더구나 암봉의 갈라진 틈새로 자라는 어린 나무들을 붙잡고 내려 서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미안하게도 그때가이드는 바로 나였다.

나도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무척 당황했다.아무도 모르는 대원들은 따라 내려 온다.

더구나 비까지 내리니 으실으실 춥기까지 했다.경주 박두윤회원은 겁이 많아 발을 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였다.

일단 회원들을 멈추게 하고 김상호대원에게 자일을 타고 어느정도 내려 가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참을 내려 간 김상호대원 왈,"형님 ! 올라 가세요.300미터가 넘는 절벽입니다."한다.

위 사진을 보세요. 300미터가 아니라 6~700미터도 넘는 암봉절벽입니다.

저 암벽을 겁도 없이 타고 내려 왔으니...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립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사고 없이 무사히 다시 정상에 올라 셨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내려 가기로 결정을 하고 지름티재로 내려 갔는데

먼저 내려 간 회원 일부가 그만 봉암사쪽으로 내려 가버렸다.

무전기도 없고 연락은 아니 되고(지금은 폰이 있지만 그때는 연락 방법은 무전기와 호루라기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입산금지로 되돌려 보낸다는 봉암사쪽으로 하산을 강행하였다.

결국 그것이 화근을 초래하였다.

      

 

희양산 안좋은 추억 둘,

김대원회원 희양산 봉암사에 감금 당하다.

 

희양산 정상에서 길을 잘못들어 암벽을 타면서 고생하고 비속에 배는 고프고

갈 길은 멀고...하여튼 기분이 완전 다운상태였다.

거기다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삼삼오오 개인별 행동을 하다가 보니 먼저 간 회원을 놓친 것이다.

나는 목격을 하지는 못했는데 같이 간 회원들의 이야기입니다.

김대원회원과 송석무초대회장 그리고 몇 몇 회원들이 앞서고 뒤서고 그렇게 봉암사를 다 내려 왔는데

스님 두분이 도사 지팡이를 들고 가사적삼차림으로 길을 막고 지키고 있더란다.

지금도 아마 軍에 불침범을 서듯이 교대로 지키고 서 있을 것이다.

도사 지팡이로 길을 막으면서 스님왈,"도로 올라 가시오"했다.

그 말을 들은 김대원회원과 다른 회원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이 스님들이야 우리가 길을 잃고 비를 맞으면서 암벽을 타면서 죽을 고생을 했는 사정을 모르니까

당연히 길을 막았겠지만 듣는 우리 회원들은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더구나 김대원회원이 누군가? 천하장사 이봉걸같이 덩치가 산만한데 잘못봤지~

다시 올라 가라니...생각만 해도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어떻게 올라 가겠는가?

배가 고파가도 못가는 실정이 아닌가?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이리로 내려 오면 안되는데 부득히 내려 왔으니 선처를 부탁합니다.라고

공손히 부탁을 했을낀데...같이 못 온게 잘못되었다.하기사 내가 공손히 해도 들어 주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그민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김대원회원의 첫마다가 "뭐 ! 도로 올라 가라고? 이 미친 놈, 이 돌중 아이가?"

뭐 대충 이렇게 욕을 섞어서 소리 쳤겠다!  한참 옥신 각신했는데 스님이 안되겠다고 판단했는가?

목탁을 두드린다.그것이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 목탁소리를 듣고 한꺼번에 몇 십명이 러닝차림으로 장작개피를 들고(뭐 맷돼지를 잡나 왠 장작개피를...)

우르르 몰려 들어 삽시간에 산만한 김대원회원을 위협하여 들쳐업고

봉암사 경내로 들어가 어느 방에 감금시켜버렸다.

그리고는 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 "다들 가시오.이 사람은 죄값을 치르고 5일 후에 보내 주겠오"했다.

삽시간에 벌러진 일였다.아무리 그래도 대한민국의 절집에서 수도 정진하는 스님께서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법도 있는데...그까지 욕 몇 마디에 사람을 감금하고(나중에 안 이야기인데 스님을 때릴려고 하고 멱살을 잡고 했었단다) 

송석무초대회장님도 한 덩치하고 기골이 대단하신데 손 쓸 겨을없이 당한 일이라 어쩔줄을 몰라 했다.

뒤에 내려 오는 사람들은 전혀 상황을 모르는 상태라 애기만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그렇게 아무대책없이 봉암사 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남훈루 어느 방에 가둔 것 같았다.

사정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렇타고 놔놓고 갈 수도 없고...헛참,진퇴양난였다.

그렇게 시간 반정도 보냈을까? 머리가 허연 60대 신사 한분께서 우리 곁에 와서 왜 그런냐고 묻는다.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기다려 보라고 하시면서 주지스님을 만나려 가셨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원회원이 사색이 되어 나왔다.

김대원을 구해준 그분이 얼마나 고맙던지...차마 물어 보지 못해서 지금도 그 분의 이력을 모른다.

짐작에 아마 지방유지,대학교수,신도회 높으신분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구출하여 원북리 마을(앞에 본 가은집)에 도착을 하였다.

배는 고파 미치겠는데...산간 오지 마을 상점에 먹을 것이라곤 라면밖에 없었다.

아마 가게에 있는 라면은 몽당 삶은 것 같다.고생끝에 아니 봄날 흠뻑 맞은 비에 추위를 안 느껴 본 사람은 모릅니다.

얼메아 춥던지... 그 라면이 꿀맛였다.그리고 라면에 소주 맛이 더 귀똥찮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희양산의 김대원회원 감금 당한 사건은 희자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희양산등산을 한다는 것이 오늘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등산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지금도 생생한 희양산등산의 고생과 감금사건은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떨어진 무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대원회원은 곧 칠순이 다가 오고,경주 형님은 병환이 깊어 걸음도 겨우 걷고,

김상호대원은 히말리아 알륭캉등반에서 동료를 둘이나 잃었고(지금도 대구에 기일에 꼭 참석한다고 함)

히말리아를 두어번 더 가고 지금은 국내산을 타면서 마라톤에 바져 있고

 나 또한 별 탈없이 30여년 째 산을 타고 있습니다.  

 

 

희양산문태고선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원으로서 80~100여명 禪僧이 수행정진 하는 곳입니다.

물론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고요

봉암사에는 30여년 동안 수도정진하는 스님이 여럿 계신다고 하니 대단하십니다.

 

 

떠나기 전에 다시 남훈루 주변에서 돌아 봅니다.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禪이었다.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1955) 금색전 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불기 2526(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터에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로고 있어 예로 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에 당시 심층거사가 지증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 3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

<봉암사 홈 페이지 참고>

 

 

오전 9시 30분경인데도 공양간에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어째 공양을 받을까 하다가 시간이 아까워 봉암사를 벗어 납니다.

원래 오전에는 입에 곡기를 넣지 않는 버릇 때문입니다.

물 한모금이면 됩니다.

 

 

 

나가면서 다시 한번 더 봉암사를 눈에 넣습니다.

 

 

 

 

 

 

 

 

많은 참배객들이 속속 들어 옵니다.

오후에 모습이 궁금하지만 이제 떠나고자 합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하루 제일 바쁜 남훈루 연등접수처입니다.

 

 

새벽공기 보다는 많이 포근해졌습니다.

다행입니다.오늘은 부처님 오신날 불기 2558년 사월초파일입니다.

좋은 날시에 전국의 불자님들과 일반 참배객들이 저마다 다니는 절집에서

소원을 빌고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축복속에 보낼 것입니다.

모든분들 성불하시기를 빕니다.

 

 

봉암사앞 계곡입니다.

 

 

 

오늘 하루 봉암사가는 이 숲길이 잠에서 깨어나 종일 붐빌 것입니다.

행여 나무,식물들이 놀랄까봐 좀은 걱정입니다.

그들도 이해하겠지요.

그동안 닫혔던 문이 열린 날인데~

최근에는 봉암사의 출입금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수도정진하는 절집으로서 수행에 지장을 주는 개방은

좀 깊이 생각을 해볼 문제가 아닐까요?

안그래도 부자 절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나는 추세이니까 걱정입니다.

제 개인적인 바램은 봉암사만큼은 가난한 절집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비록 불편함이 따르드래도 말입니다.

 

 

 

일주문 뒤에는 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네요

봉황문을 나섭니다.

 

새벽에는 어둠속에 추위를 느끼면서 지났는데

이제는 환한 얼굴의 일주문을 뒤로 합니다.

 

 

9시 30분쯤에 원북리 봉암사입구 가게 밑에 세워둔 차에 당도하여

커피 한잔을 끓여 마십니다.그리고 숨을 고르고 봉암사를 정리합니다.

이미 일반 차량은 통제되고 대형버스가 부지런히 참배객들을 태우고 속속 들어 옵니다.

지금은 들어 가는 사람들이 10리 길을 서 있는데 오후 들면서 내려 가는 사람들이 아마 절집까지 줄을 서지 안을까 싶네요

일년에 딱~하루 사월초파일에 개방하는 봉암사이다 보니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다 보니 자그만한 시골 오지 마을이

사람들로 넘쳐나 난리 굿입니다.

차를 갖고 나오면서 보니 봉암사로 들어 오는 도로라는 도로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차가 들어 오는 순서대로 아예 그 자리에 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형셔틀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 가라고 하니 그 거리가 갈 수록 장난이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20리길을 걷게될 것 같네요.

대단합니다.

하기사 오늘 낮 중으로 봉암사에 당도하면 되니 아예 여유롭게 시골풍경을 보면서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모든분들 成佛하시길...

 

 

 

 

<봉암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