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동 최씨 고택 (慶州 校洞 崔氏 古宅)
중요 민속자료 제2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최부자집 ㅡ자형 입구 대문
경주 최부자 ! 왜 지금에 와서 경주 최부자의 家係가 화제일까?
각 언론,매스컴,방송에서 최부자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토,일요일이면 찾는 사람들로 복잡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부자 이면서 주변사람들과 어울리며 배푸는 삶을 살아온 최부자가계 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방문하여 최부자 家係 내력을 설명듣고 주변을 둘러 보니 수긍이 갔다.
지금시대에 최부자 보다도 몇 갑절 부자가 많은 세상인데 베푸는 삶을 사는 부자 재벌(?)은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대문 좌,우에 ↙아래 안내문이 설명되어 있다.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씩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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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6/19,일) 오후 늦은 시간인데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많은 방문객에 새삼 놀럈고 방송의 힘이 세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 전에는 일요일이라도 방문객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 방송에 공고 카피로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경주 최부자 가르침을 소개하는 광고가 있는데...그 영향인가?
↗
대문을 들어 서면 바로 만나는 문간채.
문화유산해설사님께서 최부자 家係 내력과 최부자 집이
왜 오늘날에 칭송을 받는지를 열심히 설명해 주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좌측에 최부자의 가르침을 설명 해 놓은 안내문이 있는데
필히 한번씩 읽어 보기를 권한다.이날도 외국인들이 다소 보이던데
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느낄까? 궁금하다.
↘
문화해설사의 설명은 이어지고, 조~오기 입구에 한여성은 폰에 열심이고~
경주 최부자의 가르침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치우치지 말고,성급하지 말고,욕심내지 않는다.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치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ㅡ" 모양의 대문채
문간채 첫째 방은 문화해설사의 휴식처이다이자 자료보관실로 사용.
보기에도 시원한 사랑채
사당가는 좌측 뜰에 세워진 석탑. 오랜 세월은 말하다.
담장 너머는 그 유명한 최부자 집 전통 家酒 '교동법주'
사당 가는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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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이면서 자세를 낮추는 겸양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곡간(穀間) 모습 - 곡식을보관하는 장소인데 앞에 놓인 팻말은
최부자의 가르침이 적힌 육훈 과 육연이다.
최부자 家係의
집안을 다스리고(齋家) 자신을 지키는 지침(守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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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는 조선 최고의 부자로 통했던 경주 최 부잣집이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은 조선 중기(1600년 초반)부터
후기(1900년 중반)까지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유지했다.
부를 유지하면서도 이웃의 존경을 받았다.
최 부잣집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훈 때문이다.
최 부잣집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었다.
권력을 탐하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라는 내용의 육훈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높은 도덕적 의무)’다.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은 모으지 말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등을 담고 있다.
육연은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유사감연(有事敢然·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등이다.
최씨 가문은 이 가훈을 몸소 실천했다.
흉년에는 곳간 문을 열어 이웃을 구제했다. 1950년에는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모든 재산을 기증했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최 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종판’이었다.
그는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한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곡간의 환풍 구조
안채 들어가는 대문
'ㅁ' 자 구조의 안채
안채 마당에 있는 굴뚝 모습,
크기로 보아 그 옛날 안채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담장 너머로 오래된 나무가 최부자집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
경주교동법주
최부자집과 담장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오랜세월을 걸쳐 전수되어 내려온 최부자집 秘酒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전수자는 최씨가 아닌 배영신할머니이다.
교동법주의 안채
최부자집의 전통 요리집 '요석궁'
최부자집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요석궁 대문
↘ 이하 요석궁 내부 모습
경주 최부자집 가정식이 왜 '요석궁'이란 상호로 일반인들에게 제공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맛과 멋을 알리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경주의 맛과 멋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어 먹어 보지를 못한 아쉬움이 컸다.
요석궁은 오래된 소나무와 정원이 너무 아름답고 멋이 있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한다는 자체가 즐거움이다.
요석궁의 안내문
식사시간이 이렇게 정해져 있다.
<2011,6,19>
경주 포석정에 살고 있는 박두윤형님을 뵈려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들렸다.
박두윤! 몇 번을 언급하였지만 많은 안타까움이 묻어 나는 형님이다.산 좋아 하고
여행 좋아하고 노는 것 자체를 좋아 하고 거기다 술까징 너무 좋아 해서 결국 나이
육십에 몸이 좋지 않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든다.그러나 의지가 강해 쓰러지면 또
일어나고 해서 건강을 많이 회복했지만 예전같이 우리와 함께 하지를 못한다.
형님의 빈 자리가 너무나 커서 우리를 슬퍼게 한다.이날도 베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서서 남산 언저리로 가고 있었다.그러나 100m를 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천사같은 형수님이 있어 그나마
이 정도의 건강을 회복해 가고 있다.
진심으로 빠른 회복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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