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죽어서 왕이 된 사람,삼국통일의 영웅,김유신장군 묘

安永岩 2014. 10. 3. 23:33

가까이 살면서 장군묘역을 가보기는 실로 오랫만입니다.

올 봄 충남 논산 계백장군묘역을 둘러 보고 그와 맞수였던 신라 김유신장군묘를

조만간 둘러 볼려고 계획하였는데 이제사 가봅니다.

김유신장군묘역보다도 가는길의 벚꽃이 더 유명하니 아리러니하지요

실제로 김유신장군묘 가는 길의 벚꽃 터널길은 워낙 유명하여

벚꽃피는 시기에는 차반 사람반으로 인산인해입니다.

오늘은 조용히 장군묘역을 둘러 봅니다.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서면 바로 만나는 興武門입니다.

이 일대가 흥무공원인데 興武는 장군 서거후 160여년이 지난 흥덕왕 10년(835)에 興武大王으로 추봉되지요.

죽어서 王으로 추봉된 셈인데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일인데

가장 작은 나라 신라가 비록 외세의 입을 빌리기는 해도 삼국을 통일하는데는

단연 김유신장군의 역활과 功이 지대하였지요.

興武大王의 흥무의 이름을 따서 흥무공원으로 성역화하였지요

흥무공원내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승무전과 묘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아주 좋아 산책을 겸한 운동하는

사람들의 인기 코스입니다.

 

 

장군묘 가는 길

숲 길이 아주 좋습니다.

 

 

 

한 굽이 돌면 바로 만나는 김유신장군묘

배롱나무꽃이 반깁니다.

 

 

이날은 생각외로 젊은 관람객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리고 가족 단위로 어린 친구들도 많이 와서 보기 좋았습니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지요

 

 

 

장군묘역은 그렇게 넓지는 않아도 아주 아담스럽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빙~ 둘러 선 소나무도 인상적이고 아주 깨끗하게 유지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김유신 묘(金庾信 墓) 사적 제21호

 

이곳은 삼국통일의 명장 신라 김유신 장군의 묘입니다.

김유신 장군은 금관가야국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으로,15세에 화랑이되고 35세 때에는 아버지 서현舒玄장군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장군은 김춘추를 도와 태종 무열왕이 되게하고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겼으며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겼으며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습니다.

무공을 세운 장군은 문무왕으로 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장군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왕릉보다도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든 묘역입니다.

정작 같이 활동한 김춘추(태종 무열왕)왕릉에는 둘레석과 12지인상은 없지요

왕릉과 같은 格으로 성역화된 김유신장군묘입니다.

 

 

신라 최고관직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둘레석과 12지인상이 완벽하게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후 왕칭호,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

 

생전 최고관직,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논란이 많은 陵에 대한 이야기

 

왼쪽 碑 下에 陵 字가 보통 때는 陵인데 비가 와서 젖으면 墓로 바뀐답니다.이는

원래는 陵 자로 묘비명을 썼는데 陵 이란 칭호는 왕에게만 쓰기 때문에

흔히 대신,장군에게 쓰는 墓자로 고쳐 새겼는데

이것이 비가 와서 젖으면 묘로 바뀐다고 하네요

오늘은 맑은 날씨라서 그런가?

陵자가 선명하네요

  

 

 


 

 

 

좀더 상세히 김유신장군에 대해서 공부 좀 해볼까요?

 

  개요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 전체를 지배하려 했던 당나라를 물리쳤다.

 

 

 

  출신 및 배경

 

595(진평왕 17)~ 673(문무왕 13)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大梁州: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買利浦城)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을 진압했다.

그해 10월에는 압량주군주로서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삼국통일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큰 것이었다.

즉위 다음해에 대각간(大角干)이 되었고, 그해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했다. 660년 상대등이 되었다.

그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고전 끝에 물리친 뒤 소정방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1년(문무왕 1) 6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중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소정방 군대를 지원하여 군량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꾀하자 인문·천존·죽지 등과 함께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 당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2,000호를 받았다.

666년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이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했다.

그뒤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에 자문 역할을 했다.

 

 

 

  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조:다음백과사전>

 

 

 

김유신 신도비

 

 

 

 

 

 

김유신장군묘에서 내러 오면 바로

좌측으로 흥무대왕 성지로 가는 숲길이 나옵니다.

가볍게 둘러 봅니다.

 

 

장군의 위퍠를 모신 사당 승무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