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의 혼이 서려 있는
삼기산 금곡사지(三岐山 金谷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산 9 - 1
(금곡사지에는 전에 있던 대웅전자리에 약사전을 새로 건립중였다.2012,2,5)
* *
원광법사(553?~637년)는 금곡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으며 589년 중국의 陳나라로
유학을 했다. 그는 거기서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쳤기에 중국의 당속고승전(唐續
高僧傳)에 전기가 실릴 정도였다. 원광법사는 11년간의 유학에서 600년에 귀국하니
모든 국민뿐만 아니라 진평왕도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인처럼 높였다.원광법사는
귀국하여 잠시 가실사(천도 운문산 근처의 절)에 있었는데 귀산 추항에게 화랑도
화랑오계(花郞五戒)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애기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주역을 담당한 화랑들에게 그들의 정신적,도덕적,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생활지침을
제공했던 것이다.원광법사는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지었으며 말년에는 왕이 손수 의복과 약물등을 마련래 주었고 637년 임종하자
장례도구를 내리어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의 부도는(우리나라 최초의 부도이며)
금곡사에 안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은 소실되었고 부도의 일부가 파괴 되었다.
<현지 안내문>
금곡사지를 찾아가는길에 만나는 화산곡저수지
평소에
포항에서 안강을 거쳐 영천으로 오가면서 이 '금곡사지이정표'를
보고 몹씨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하니 신라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였던
원광법사(圓光法師)의 부도탑이 있는 이름있는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특히 원광법사가 누구인가? 신라 화랑의 생활지침이 되었던 화랑세속오계를
지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큰 스님이 아닌가?
그래서 그의 흔적을 찾아 보고자 차일 피일 미루어 오다가
오늘. 2월 5일 양동마을에 갔다가
내친김에 지척에 있는 금곡사지를 찾게되었다.
안강 옥산서원을 들어 가는입구를 지나 딱실못을 못가 좌측으로
들어가면 두류공단을 지나 화산곡저수지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올라 가는 길이 나 있다.
화산곡저수지는 제법큰 저수지로 농업용수공급을 위해
2004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가216m,높이가 40m의 크기이다.
그러나 예전에 있던 논들이 지금은 각종 공장(두류공단)이
들어 서서 이 농업용수가 별소용이 없게된 듯하다.
뚝에서 내려다 본 하류쪽 풍경
저수지 상류 모습,금곡사지는 저수지 좌측으로 난 길로 굽이굽이 올라 간다.
차로 굽이 굽이 돌아 저수지 중간에서 본 모습,멀리 안강의 진산 도덕산이 보인다.
저수지 상류모습
|
|
제법 가파른 길을 돌고 돌아 올라 간다.
금곡사지가는 길은 비포장길로 노폭이 좁아 중간에 차를 만나면 낭패다.
물론 중간 중간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나 그 거리가 너무 멀다.
|
|
여기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 올라 가야 한다.
그렇치 않으면 중간에 차를 만나면 꼼짝없이 빠꾸(후진)해야 한다.
나는 겁없이 차로 올랐는데 겨울이라 다행히 내려 오는 차는 없었다.
금곡사지가는 길은 경주 무장사지 가는 길과 비슷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삭막하지만 봄,가을로는 제법 운치 있는
길 같아 그때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금곡사지 밑에 계곡을 끼고 제법 너른 터가 있어 차를 여러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우측 가파른 길을 올라 서면 금곡사지 다.
굴삭기는 지금 금곡사지 복원공사에 투입되어 공사중이다.
올라 가는 길과 금곡사지 축대
가을에 주변 풍경이 좋을 것 같다.
아래에서 본 금곡사지
금곡사지
금곡사는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제법 큰 약사전이 들어 섰다.
금곡사낙성식 현수막
세속오계를 제정한 원광법사 창건도량이라고 씌여 있다.
금곡사 전경
좌측에 원광법사부도탑 과 우측에 새로 지은 약사전
나는 이 금곡사지에 바로 부도탑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다.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金谷寺址 圓光法師 浮屠塔,사리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산 9-1
이 부도탑은 원광법사( 圓光法師,? ~630)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높이 2m 정도로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1층 몸돌 4면에는 4각형의 문틀을 새기고 파내어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龕감실감,室)을 만들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밑면 층급 받침이 4단이다.
원광법사는 속성(俗姓)이 박씨 또는 설씨로 80세 혹은 99세를 살았다고 한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고,
수(隋)나라에 보낸 걸사표(乞師表)를 지을 정도로
불교사상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다.
신라 진평왕 52년(630)에 황룡사에서 돌아가시자
명활산에 장사지내고 삼기산(三岐山)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현지 안내문>
부도탑 4면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조각하였다.
화랑도 세속오계(世俗五戒)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자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자
③ 교우유신(交友有信), 믿음으로 벗을 사귀라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말라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가려서 살생하라.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花郞)의 실천덕목이 되어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되는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세속오계 중 특히 살생에 대한 조항은 불교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 윤리로 요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면에서 본 모습
약사전,산신각,요사채
지금의 금곡사는 부도탑,약사전,산신각,허름한 요사채가 전부이다.
터도 그렇게 넓지가 않아 더 이상 당우를 지을 자리가 없다.
그 옛날에도 대웅전과 요사채가 전부였을 것이다.
주변 산세가 금곡사를 중심으로 삥~둘러 쌓여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앞에 서면 사방이 뻥~뚫린 시원함은 이 금곡사에는 없다.
왠지 음산하고 답답한 느낌이다.더구나 대웅전앞이 큰 산으로 딱 막힌 형국이다 보니
그러한 느낌은 더 들었다.대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홀로 수행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공간인 것 같기도 하고
하늘이 적어 그 좋은 햇살은 잠시 뿐인 것 같다.
이곳에서 원광법사가 정진수도하였다니...
큰 스님의 뜻이 무었였을까?
속세와 단절~~그런 의미가 아니였을까? 싶다.
입구에서 제법 먼~길을 들어와 요새와 같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수행을 한다?
새로 지은 약사전 모습
예전의 대웅전에 비해 제법 웅장하게 지었다.
↘아래 예전의 대웅전 모습
다른블로그에 있는 예전의 대웅전사진을 참고하였다.
마당 난간에서 본 계곡 모습
금곡사지 들어 가는 입구에서 바라 본 좌측 협곡
약사전 뒤 능선
옛 모습 금곡사
오히려 옛 모습의 금곡사지가 더 운치가 있엇던 것 같다.
원광법사 부도탑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지금은~~~
특히 대웅전 앞에 있던 2그루의 나무는 어디에???
웅장한 약사전 건물이 부도탑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 금곡사지의 의미는 바로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주인공이다.
예배의 공간도 바로 이 부도탑이 아닌가?
차라리 무장사지처럼 복원하지 않고 탑만이 이 공간에 있었드라면...
하는 생각이다.물론 스님이 기거할려면 요사채 정도는 있어야 겠지...
옛 대웅전을 해체하면서 현판을 아래 컨테이너에 붙여 놓았다.
금곡사지에서 내려 가는 길
주변 풍경이 좋은 곳이다.
금곡사지 계곡 모습이다.
봄,가을에는 제법 운치가 있을 것 같다.
<2012,2,5>
'- 절집寺刹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주] 가지산 석남사 (0) | 2012.03.20 |
---|---|
[밀양] 신비로움이 가득한 만어산의 어산불영 - 만어사 (0) | 2012.03.17 |
[기장] 불광산 장안사 척판암 (0) | 2012.01.04 |
[기장] 천년고찰 장안사長安寺 (0) | 2012.01.02 |
[동해] 두타산 관음암 (0) | 2011.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