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선계곡에 숨겨진 아미타세계
조형예술의 극치,서암정사
(대한불교조계종 지리산 석굴법당)
<소회>
몇해전에 모방송국에서 서암정사 원응 큰스님께서 <화엄경금니사경>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제사 가보게 되었다.
원응 큰스님께서1985년부터 10여년간 <대방광불화엄경> 58만7261자를
우선 한자씩 한지에 옮겨 적는데 5년,감지(닥종이)를 그위에 덧대고
곱게 빻은 금가루를 붓끝에 묻혀 이를 다시 적는
금사(金寫)작업 7년.12여년만에 완성하였다는 보도였다.
오늘날 <화엄경금니사경>은 전세계가 경악 할 만큼 위대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또한, 큰스님의 또다른 업적은 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서암정사의 대원력이다.
인근 벽송사 주지였던 원응 큰스님은 6.25전쟁때 지리산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 하기 위해 1989년 부터 벽송사에서 600여미터 떨어진 이곳에
'서암정사 석굴법당'을조성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30년간 계속되어 온 그 집념이
대단하며 그 원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 부처님의 보살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석굴법당내부에 조각된 수많은 불상들을
조각한 홍덕희외5명의 석공들! 진정 이시대의 아사달이 아닐까?
.....
하여튼 서암정사를 일단 들어 가보자.
오도재를 내려 와서 '서암'을 가르키는 이정표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부속암자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정표에서 우측벽송사는 20여분거리,서암정사는 5분거리다.
추성리 올라가는길에 ...
추성리에서 본 지리산 능선들
서암정사 주차장
서암정사가는길(계단으로...)
옆에 편안한 길이나 계단길이나 위에서 만난다.
그러나 계단길로 가야 화엄의 세계로 바로 간다.
처음 맞이하는 두개의 돌기둥
우측에 <百年江河萬溪流>, 좌측<同歸大海一味水> 새겨진 돌기둥
즉,수많은 강물 만갈래로 시내가 흐른물은, 큰바다로 돌아가면 모두 다 한 물 맛이로다.
뭔가 와 닿는 부처님의 말씀에 더욱 기대가 되고 범상치 않을 무엇이 있는 듯 했다.
10여미터 더 올라가면 또다른 두개의 돌기둥.
그러나 이번 돌기둥은 용이 승천 하듯 매우 힘이 느껴지는 모양새다.
이른바 대방광문을 오르는 일주문인 셈이다.
오른쪽 돌기둥엔 <摩詞大法王>그리고 왼쪽 기둥엔 <調御三千界>
즉,거룩하고 위대하신 부처님께서는 온세상을 조화롭게 이끄시다.
겸손한 맘으로 한계단 한계단을 오르다.
좌,우에 이쁜 단풍이 더욱 운치가 느껴졌다.
대방광문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문이다.
좌,우 암벽사이로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뤘다.
▲
대방광문 들어가기전 우측에 새겨진'사천왕상'
절벽바위 자연석을 파서 만든 사천왕상의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였다.
경주 석굴암의 사천왕상을 본보기로 하였단다.
▼
미타굴
대방광문을 통과하면 맞닿는 미타굴,현판은 원응큰스님 글씨다.
드디어 석굴법당 앞에서
자연과 인공의 만남.전혀 어슬퍼지 않고 조화롭기까지 하다.
나즈막한 뒷산과 갖가지 나무며,특히 어린반송이 귀엽기까지하다.
특히 극락전은 바위굴속에 조성되어 있어 아주 특이하다.
이렇게 바위돌을 그대로 활용해 사찰 전체가 바위와돌의 조각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 곳은 이곳 서암정사가 유일하다.
급경사 바위 골짜기에 이런 연못을 만들다니...
극락전(석굴법당)앞에 조성해 놓았는데 가만이 살펴보면 재미있다.
꼭 누구 대가집 정원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만큼 오밀조밀하게 만들었다.
저멀리 돌탑,5층석탑들 및 갖가지 탑,그리고 거대한 바위에 소나무와 단풍나무들...
연못 가운데 불상과 蓮,그리고 물과 파란 하늘...
극락전 앞에서 본 풍광
시간관계로 조오기 보이는 암자에는 가지 못했다.
안양문을 안에서 본 모습
서암정사 석굴법당 내부 모습
거대한 암벽 내부 전체를 정교한 솜씨로 조각을 하여 화엄세계 석굴법당을 만들었다.
1000년이 흐른뒤 후세사람들은 이석굴을 보고 뭐라 평 할까? 지금의 석굴암정도평가?
아닐것이다. 더이상의 평가가 나올 것이다. 저 거대한 바위를 깍아 내어 불단을 조성한
석공들의 공덕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매일 돌을 깍고 연마하며 칼과 끌로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을 석공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대세지보살,아미타부처님,관세음보살
내부 사진 찰영금지인데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9배하다.
나는 불교를 떠나 하나의 위대한 조각품의 작품을 감상했다.
가운데 '지장보살'
이렇게 천정,벽,기둥, 모든 사면에 조각을 했다.
연못,위에 석굴법당(극락전)
좌측에 보이는 거대한 암벽속이 법당이다.그리고 법당위에도 석탑과각종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 서암정사는 보이는 모든 곳에 탑을 세우고,불상을 조각해놓았다.
어느블로그에서 서암정사를 '하늘정원'이라고 평했다.
정말로 멋진 표현이다. 그렇다! 하늘정원이 아닌가?바로 이모습이...
미타굴 앞에서 본 추성리 의중마을
삼라만상각별색(森羅萬象各別色)환향원래동근신(還鄕元來同根身)
즉,삼라만상 온갖 모습이 제각기 다르지만,고향으로 돌아가면 같은 뿌리라네.
서암정사를 나가면서...조오기 두분 사진찍어준 아가씨인데...여행다니면서
견문을 넓히고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란다.
지리산 천왕봉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와 괴석
수백년된 고사목과 단풍들,,,
서암정사 입구에 있다.
칠선계곡 하류
<참고로 아래글은 서암정사 홈페이지에 있는글을 옮깁니다.>
서암정사의 유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민족의 미극이 유난히도 치열하고 깊었던 이곳 지리산(智異山), 1960년경 전화(戰禍)가 지나간 지 한참 뒤이지만 산간오지(山間奧地) 두메산골인 벽송사(碧松寺)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자연(大自然)의 섭리가 인연(因緣)에 사로잡인 인간들의 희비에개의치 않나니, 한 때 천지를 진동하던 총성과 온 산을 뒤덮었을 포연(砲煙)의 폭풍이 휩쓸었을 이곳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는 듯 산새가 지저귀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오늘날 서암정사(瑞庵精寺)가 있게 된 것도 역시 억겁(億劫)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한 그림자가 아닌가 한다. 문득 지난 일을 회상하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어느 날 복잡한 도시인 부산을 뒤로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 벽송사다. 인적도 드믈어 한적한 산사(山寺)벽송사,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지는 수행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너무 힘이 들고 갈등도 많이 생겨 여기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가 새는 법당에 탈금(脫金)이 다 되어 새까만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기를 거듭하면서 그럭저럭 눌러앉아 "여기가 또한 인연지(因緣地)려니.."여기고 폐허를 수습하다 보니 어언 10여 성상(星霜)이 훌쩍 흘렀다. 구석구석 묵은 쑥대가 나부끼는 1970년대 초의 어느 포근한 봄날 오후,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내를 거닐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잊혀져 가는 묵은 옛길을 따라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에 이끌리듯 와서 멈춘 곳이 바로 오늘의 서암정사 터다. 석굴법당 조성造成경위 이곳이 만년도량(萬年道場) 의 성지(聖地 )임을 확신하고 산승(山僧)이 도량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사람이 일부러 깍아놓은 듯한 거암, 즉 지금의 석굴법당 전면(前面)에 다다른 순간 몸과 시선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여기로구나, 아! 좋구나...."조용히 눈을 감고 부처님의 영산회상, 그리고 아미타상을 상상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도하면서 염원(念願)의 심층에서 떠오르는 어떤 영상(影像)을 느끼니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世界)로다. 전쟁의 참화(慘禍)로 이 주변 지리산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혼(寃魂) 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의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人類)가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광명 안에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 가 실현되기를 발원(發願)하면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다. 조성과정의 이야기들
서암정사는 대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조화로 준비된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덕이 보태지면서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30여년 전 불사(佛事)를 시작한 이래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지만 좌절하지않고 장엄한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주 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 공덕과 더불어 석공들의 공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덕회, 이종원,이승재, 이금원, 이인호, 맹갑옥 석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한치의 흘림 없이 조각을 완성했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겉석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조각(細彫刻 )으로 마무리 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여러 석공 중에서 특히 홍덕희 석공은 서암정사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석굴법당을 위시해 사자굴의 모든 조각을 마무리 했다. 마천면 추성리와 의탄리의 몇몇 인연이 있는 분들은 처음 터를 닦을 때부터 시작해 도량 조성 과정의 크고 작은 일에 큰 힘을 보탰다. 험한 장소에서 도량을 조성하다보니 뜻밖의 사고로 자칫 불사가 중단될뻔 한 적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불보살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20여 년 전쯤일까. 지금의 사천왕성 맞은 편에 있는 돌탑을 쌓을 때였다. 탑 쌍기를 끝낼 무렵 점심시간이 되어 일꾼들을 태워 경운기를 재조한 짐차(일명 탈탈이)을 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렸다. 운전자를 포함해 일곱 명이 탄 짐차는 걷잡을 수 없이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짐차가 쌓고 있던 탑에 부딪혀 탑을 무너뜨리고 멈춘 덕분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대형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점검해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무너지 돌 더미 속에서 옷자락이 내다 보였다. 황급 결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무너진 돌 더미를 치워내자 탑 쌓는 기술자가 모로 누워 기절한 채 돌 밑에 깔려 있었다. 호흡도 거의 끊어져 있었으나 한 참 뒤에야 돌아왔다.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한 결과 갈비뼈 3대만 부러지고 다른 곳은 이상이 엇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이 사람은 사고가 나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낀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입원해 있을 때도 같은 노인이 나타나 밀치는 바람에 병상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상처로 인하여 신체가 허약해지고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질 때 관세음보살이나타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
원응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