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안강] 수재정,성산서당

安永岩 2013. 4. 25. 02:00

 

자옥산과 삼성산에서 내려온 계곡 암반위에

그림 같이 앉은 수재정(水哉亭),성산서원(聖山書堂)

 

 수재정水哉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29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쌍봉(雙峯)정극후(鄭克後,1577~1658)의 별장으로

그가 관직에서 물어나 후학을 교육하던 곳입니다.광해군 12년(1620)에 세웠고

영조 4년(1728)에 중수하였습니다.성산(聖山)을 배경으로 석천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자연돌을 이용하여 높은 축대를 쌓은 후 정자를 앉혔습니다.

 

 

수재정입구입니다.

門이 잠겨 있어 좌측으로 해서 계곡길로 내려 섭니다.

 

 

수재정 내부 모습입니다.

제법 너른마당에 돌탑 2기와 담장아래 철쭉이 막 피어 날려고 하네요

겹벚꽃이 분홍빛으로 만개하여 풍치를 더하고 담장아래 제법 큰 백일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계곡으로 내려 섭니다.

수재정 누각을 바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수재정 누각형 정자 앞의 풍경은 이웃한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독락당은 어래산과 도덕산에서 내려온 계곡 풍치절경지에 자리 하고 있지요

이 수재정도 삼성산과 자옥산에서 내려온 계곡의 풍치절경지에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여기 계곡을 한참 위 아래로 흘터밨는데 여기만한 곳이

없는 주변 경치가 참으로 좋은데 정자가 높게 앉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전국의 명승지에 절경지에 꼭 이런 정자나 서원을

세우고 자연을 즐기면서 사계절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글을 읽고 친구와 벗하고 풍류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석천계곡모습입니다.

위,아래로 암반위로 폭포가 있는 멋진 풍경입니다.

 

 

 

아래 계곡에서 본 수재정모습입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게 쌓은 터에 정자를 올려 놓아 더 기품이 납니다.

 

 

 

자연석으로 1단,2단,3단 높이로 단계별로 쌓은 모습입니다.

아무리 계곡물이 넘쳐 내려도 정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구조이네요

 

 

 

앞면 3칸에 옆면 1칸의 건물로 가운데 칸은 마루로 하여 개울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양 옆칸은 온돌방으로 하였고 앞에는 난간을 두른 작은 물림을 하여

기둥을 받치고 있는 누각형 정자입니다.건물의 건축 기술에는

조선 중기와 후기 양식이 함께 사용되고 있어 여려 차례 고쳐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대체로 영조 때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석천 건너편에는 성산서당(聖山書堂)이 있습니다.

 

 

 

큰돌,작은돌을 섞어서 절묘하게 쌓은 모습입니다.

다만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좀 약한 듯 하네요

 

 

계곡쪽에서 올라 가는 계단길입니다.

아마도 계곡 건너편에 있는 성산서당에서 오갔던 길인 듯 합니다.

 

 

 

수재정 별채입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시중들던 사람들이 거처한 듯 합니다.

 

 

 

정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그럼 이 건물의 주인장인 쌍봉 정극후란 도대체 어떤 인물였을까요?

 

조선시대 학자 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이 곳 산수를 사랑하여 초가 정자를 짓고

평생 동안 벼슬길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종사하였습니다.잠시동안 효종대왕의 왕자시절 사부가 되었으나

그것도 노환으로 그만 두고 이 곳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키며 노후를 보낸 곳입니다.

갈암 이현일이 말한 쌍봉선생은 거인(巨人) 같은 풍채로 관대하고 포용력이 크며 남이 대들어 상대하지 않았다.

평소에 빨리 말하거나 급한 얼굴색이 없었으며 비록 하인들을 대할 때라도 성낸 말과 표정을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회의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술을 마셔도 정신이 혼란할 정도로 취한 적이 없었다.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고 남의 환란과 궁핍한 사정을 보면 있는 힘을 다하여 구휼하여 주니

집안 사람들은 물론 고을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쌍봉은 당시 82세까지 살며 장수하였고, 쌍봉부인 이씨는 88세의 장수를 누렸습니다.

자녀는 3남3녀를 낳았고,쌍봉 78세에 부인이 83세로 回婚禮를 맞게 되었는데

자녀들이 헌수례(獻壽禮)를 올렸고 고을의 모든 분들이 모여 축하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自號를 쌍봉노인(雙峯老人)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세월에 부부가 같이 살아 회혼식(결혼60주년)을 올렸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광경였을 겁니다.

 

 

 

계곡 윗쪽에서 본 수재정 모습입니다.

쌍봉선생이 사랑한 수려한 경관입니다.

 

 

 

 

 

쌍봉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성산서당(聖山書堂)

 

성산서당(聖山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11

 

이 서당은 조선 순조(純祖) 14년(1814)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鄭來永이

雙峯 鄭克後를 모시기 위하여 세웠습니다.처음에 사우와 서사가 있었으나

大院君 때 철거되었고 지금은 서사만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 서사에서 서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역시 門이 굳게 잠겨 있어 담장을 따라서 한바퀴 돌아 봅니다.

 

 

 

담장너머로 본 성산서당 모습

 

 

 

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양쪽에 날개 지붕을 달았다.

가운데 칸은 마루로 하고 양 옆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정면 3칸은 박공으로 하고 퇴칸은 날개지붕을 한 관계로

무리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모서리마다

2개의 팔각지붕을 세워 독특한 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3익공 집으로 조선 후기의 기술적 방법을 잘 지니고 있고

지붕과 가구법도 우수한 건물이다.

 대청 뒷면에 흥교당(興敎堂)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원래편액의 '사(祠)'자를 흥교당의 당(堂)자를 본 떠

성산서당이라는 편액을 만들었다고 한다.

 

※익공(翼工) :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하고 초각한 공포재

 

 

 

역시 성산서당 앞 마당에도 오래된 향나무가 한그루 외롭게 세월을 말하고 있습니다.

 

 

 

별로 가끔이 없이 방치된 듯한 모습이라 스산한 느낌이 듭니다.

 

 

 

날개지붕모습

 

 

 

성산서당은 수재정 건너편에 마주 하고 있으며 뒷산이 삼성산이다.

계곡을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셈인데

아마도 스승이나 제자들이 머리를 식힐 때는 계곡에서

멱도 감고 세수도 하고 놀았을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다가 옵니다.

 

 

 

 

 

 

 

 

 

 

 

 

 

 

 

 

 

 

 

 

 

 

 

 

성산서당에서 본 길 건너 편에 수재정 모습입니다.

 

성산서당 전경

그 옆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이렇게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매우 신성시 하는 은행나무 같습니다.

 

 

 

 

성산서당,수재정 위에 있는 저수지입니다.

 

 

 

성산서당 옆에는 현재 사람이 거주 하고 있네요

 

 

 

 

성산서당 바로 밑에 있는 집인데

개나리와 겹벚꽃이 너무나 이쁘서 차를 세웁니다.

 

 

 

<2013,4,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