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영해지방에 이름도 괴이한 양반마을이 있습니다.바로 괴시마을입니다.
그렇게도 영덕과 강구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등잔밑이 어둡다고 영해 망월산 아래에 포근히
자리한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괴시마을의 존재를 안지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은 오래 참지 못하는 성미라 2013,2,3일 일요일 오전에 영덕으로 해놓았습니다.
더구나 고려말 3隱의 한사람,목은 이색선생님이 태어난 곳이라 하니 더욱 궁둥이가 둘썩 들썩~ 아니 가고는 못베기지...
영덕하면 대게가 많이 나는 고장,봉숭아로 유명하고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고장.. 정도로만 알아 온 터라
이러한 양반마을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비록 하회나 양동에는 못 미치지만 제법 큰 양반 집성촌입니다.
실제로 도착하여 보니 꼭 경주 양동마을 같은 느낌입니다.
망월봉 아래 포근히 자리한 30여채 고건축물이 포근히 자리하고 있고 특히 앞으로 영해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쳐 있습니다.
이 모습이 꼭 경주 양동마을의 풍경과 흡사합니다. 다만 마을 규모는 양동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특히 오래된 고택은 이곳 영해면에 괴시리,원구리,인량리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영해평야가 넓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그 중에 괴시마을에 종택 및 고택이 유명하네요
자~ 마을 안으로 들어 가 봅니다.
괴시(槐홰나무괴,市) 마을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이 고장 출신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써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원나라 구양박사(歐陽博士,歐陽玄)의 출생지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전합니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望日峰에서 뻑어 내려오는 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이러한 자연 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西南向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려 말에는 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그 후 조선 명종(明宗,1545~1567) 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인조(仁祖) 8년(1630)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처음 입주하였다고 하네요.
그 후 3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맨 나중에 들어 온 영양 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괴시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축물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마을 내에는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 문화재와 고가옥 30여호가 밀집되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마을입니다.
<현지 안내문 참조>
괴시마을 안내도
영해면소재지에서 바다쪽(대진항)으로 가다 보면 우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30여채 고택 중에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무려 14채나 됩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 갑니다.
괴시리 영감댁(槐市里 令監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3호
이 건물은 호은 남홍수(南興壽,1813~1899)공이 1847년경 건립하였고
1938년 호은공의 증손 남대철이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호은공은 동의계(同義契)와 접소(接所)를 설치하여
빈민규휼에 앞장섰고,후학교육에 힘섰다고 합니다.
마을이 깨끗합니다.그리고 너무도 조용하네요,일요일인데도 말입니다.
괴시마을은 꼭 일부러 만들어 놓은 조형물을 보는 듯 합니다.
새로 만든 마을 진입로와 깨끗하고 획일화된 담장때문인 듯 합니다.
조금은 설렁한 느낌은 그 흔한 나무들이 주변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안으로 들어 가면 비교적 오래된 듯한 고택들을 만납니다.
물론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네요
다만 휴일이라 관광객들 때문에 대문을 굳게 잠가 놓고 있어 안을 볼 수 없어 유감이네요
겉만 훌터 보고 나옵니다.
하기사 조선조 양반네 집들이 대부분 ㅁ자형 구조에 바깥과는 완전 단절된 공간이지요
이곳 역시 그렇습니다.
대문만 닫으면 안에서는 누가 죽어도 모르는 밀폐된 공간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서민들이 살던 집은 완전 개방된 ㅡ자형 집이지요
양반네들 처럼 숨길 것도 없고요...
괴시마을에서 최고 고택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으로 들어 가는 골목입니다.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英陽 南氏 槐市派 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7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소유자의 12대조인 남붕익(南鵬翼)이 17세기말에 건립했다고
전하는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입니다.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正寢)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입니다.
다만 사랑채 부분이 오른쪽으로 3칸 돌출되어 있어 한쪽 날개집의 평면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정침의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은 1900년대 초 건립된 것으로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조선 후기 주택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침(正寢) 이란? 즉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즉 안방공간입니다.
물소와 서당(勿小窩 書堂)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94호
괴시파 종택 바로 옆에 있으며 물소와(勿小窩) 남택만(南澤萬,1729~1810)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한 때는 사당(祠堂)으로도 활용되었다고 하네요
물소와(勿小窩) 남택만(南澤萬)은
좌승지로 추증된 유학자로서 괴시리에서 배출한 인물 중에 최고라고 하네요
☞ 물소와(勿말물,小작을소,窩움집와)
南氏 괴시파 종택 뒤산에 올라서 본 괴시리마을 전경
바로 앞에 소나무가 있는 건물이 물소와 서당이며, 우측에 괴시파 종택, 그 앞에 녹색 천막이 쳐진 집이 물소와 고택이다.
현재 물소와고택은 내부 수리 중에 있네요.
저 멀리 가운데 산이 영덕의 진산 칠보산입니다.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과 그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영해평야가
끝 간데 없이 한눈에 들어 오지 않을 만큼 넓다.
평지에 위치한 괴시마을이 참으로 평화로와 보입니다.
저 끝은 긴~백사장으로 유명한 고래불해수욕장이겠네요
고래불이란 이름도 목은 이색선생님이 지었다지요
즉 고래가 물을 품는 것을 보고...
마을 안쪽 모습입니다.
괴시동 물소와 고택(槐市洞 勿小窩 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9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물소와(勿小窩) 남택만(南澤萬)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南有鎭)이 건립하였고 1924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정면 5칸,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침(正寢)과 고방,중문,사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 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인 건물입니다.
건물은 당시의 유교적 윤리에 의해 남 여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출입할 때 사랑채 정면이 여성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랑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는 우물애서 여성이 가사작업 할 때 노출되는 것을 고려하여
중문간 앞과 담벽에서 중문간쪽으로 약 6m 정도의 담벽을 쌓아 놓았습니다.
물소와 가문은 남경순 (일제시대 영해 향교가 폐교된 후 다시 복원한 후손)을 비롯해
특히 훌륭한 후손이 많이 배출된 집으로 유명합니다.
물소와 남택만은 좌승지에 추증된 유학자로,
괴시마을에서 가장 큰 벼슬을 지냈다 할 수 있지요
목련이 봄을 기다고 있습니다
물소와고택은 지금 내부 수리중이라 어수선하네요
사랑채와 구별을 위해 쌓아 놓은 담벽입니다.
오래된 담장의 기와가 세월을 이고 있습니다.
목은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나즈막한 담장길이 정겹습니다.
동네 입구 우측으로 산길로 해서 가는 등반로도 있지만
이렇게 동네 한가운데에서 기념관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고택을 좋아 하기 때문에 비교적 근래에 지은 기념관을
보기 싫어 가지를 않고 계속 고택에만 채널을 고정합니다.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盈德 槐市里 瀛隱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9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건물 현소유자의 5대조인 영은 남공수(南公壽,1793~1875)가 1871년에 건립하였습니다.
건물은 정면 4칸,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을내 다른 가옥과 달리 전면과 좌,우측에 처마를 달아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팔작지붕의 박공부분이 정면으로 보이게 한 것이 이 주택의 특징입니다.
건축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영덕지방의 지역성을 나타내주는 평면구성과
보기 드믄 지붕형태 등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고 하는데
가장 늦게(2004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네요
영해 구계댁(寧海 邱溪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6호로서 이 건물은
졸헌(拙軒) 남경악(南景岳,1763~1821)이 1805년경에 세웠으며,
그의 현손 남경목(南敬穆)이 1910년경에 수리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호지 마을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ㅁ자형집으로 정면4칸,측면 6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마을의 다른 주택과 마찬가지로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채광(採光)을 고려하여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한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괴시리'가 맞는데 '괴시동 물소와...'로 표기 하고 또 영덕인데 '영해 ..무슨댁'으로 표기를 하여 좀은 훼깔립니다.
해촌고택(海村 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9호이며,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물소와고택과 함께 제일 먼저 (1987년)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오래된 고택입니다.
넓은 마당이 특징적인 해촌 남극만공의 해촌고택(1775-영조31년)은 전통의 가옥구조에서
한 번의 보수(고종 15년-1878년)를 거친 흔적으로 시대에 따른 가옥구조의 변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면4칸, 측면 7칸의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었고, 안채는 정침과 아랫방, 중문, 큰 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배치되었다.
주택의 평면과 공간구성이 점차로 변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해촌고택은, 조선후기에 지어지고,
19세기에 중수한 건물로 평면이 비교적 구제의 구성과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후기 주거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치를 지닙니다.
괴시리 마을을 한바퀴 돌고 밖으로 나옵니다.
괴시리 마을에 오래된 나무인데 다른 지역처럼 그 흔한 회화나무,향나무,배롱나무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회화나무 한그루가 산 입구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선비정신과 무관한 개울가에나 남직한 나무 같은데 꽤 오래된 듯 합니다.
나무 이름을 몰라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역시 모르네요...
혹.왕버들나무가 아닌가 싶네요.
생각...
영덕 괴시리 마을은 오래된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건물들이 비교적 200여년 전후입니다.
더구나 오래된 마을의 상징물인 뭐~ 500년 되었다든지 하는 古木나무가 하나 없는 것이 마을을 설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획일화된 최근의 담장 또한 格을 떨어 뜨리고 있으며 나무,풀,꽃나무들이 골목길에 없으니
더욱 설렁할 것 같네요.
비교적 건축물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보기는 좋은데 개방을 하지 않아
안을 볼 수가 없어 유감이고요
지금이라도 집안 곳곳에 백일홍나무라도 많이 심었으면 합니다.
백일홍은 선비의 상징이 아닙니까? 안동 병산서원에 백일홍처럼 말입니다.
백일홍은 고축물의 품격을 한단계 업(UP)시킴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보기에도 좋고요^^
<20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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