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 감은사지

安永岩 2010. 8. 16. 00:29

 

감은사지(感恩寺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감은사지동서3층석탑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 2기.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撑柱)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隅柱)와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2

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지(感恩寺址)는 사적 제31호이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回廊)은 강당의 정면어간(正面御間)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한국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

 

 

 

 

 

 

 

 

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 때 삼층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 당대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盛唐)을 능가하고 있다.

현재 중문지(中門址), 회랑지(回廊址), 남반(南半) 및 금당지(金堂址)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講堂址)는 민가에 있다.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 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