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전남/구례] 구례 운조루(雲鳥樓)

安永岩 2010. 8. 4. 19:28

 

구례  운조루(雲鳥樓)

 

중요민속자료 제8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1779)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집은 一자형 하인들의 방(행란채)와

T자형 사랑채.ㄷ자형 안채가 있고 대문 안의 행랑채가 서로 연이어져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구조 양식은 기둥과 기둥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구조(민도리집)로서,지붕은 사랑채,안채가 연이어져 있으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운조루 입구 연못과 대문,행랑채

 

 행랑채(하인들 공간)

 

대문을 들어 서면 바로 만나는 T자형 '사랑채'

 

 ㄷ 자형 안채

운조루 현퍈이 걸려 있다.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

 

운조루(雲鳥樓)는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유이주는 어려서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채칙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힘이 세고 기개가 뛰어났던 인물이다.

당시 마을사람들도 운조루의 터가 길지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바위가 험하여 집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이주가 전라도 승주(지금의 순천)에서 낙안군수로 재직하여 있을 때

 "하늘이 이 땅을 나를 아껴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하며 수백명의 장정을 동원해 집터를 닦았다고 한다.

 한편 오미리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왔다.

오미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 세 명당은 오미리 구만들에서 상,중,사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운조루가 상대인 금구몰니 명당이고, 행랑채 밖 못자리가 중대 금환락지,

면소재지에 있는 유부사가 세웠다는 돌탑자리가 하대 오보교취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운조루가 금구몰니의 명당에 해당한다고 하는 항간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유이주가 집터를 잡을 때 땅속에서 어린애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돌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둔 것이다.
 
운조루가 명당터라 하여 손꼽히지만, 기실 눈여겨보아지는 것은 운조루의 건축구성이다.

운조루의 옛모습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살펴 볼수 있다.

1,000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드문 이집의 전체 건물구성은

 -자형 행랑채(24칸), 사랑마당 T자형 사랑채(손님을 맞는 내사랑인 귀래정이 6칸,

주인이 거쳐하던 외사랑인 운조루가 16칸), 사랑 뒷마당, ᄆ자형 안채(36칸) 안마당,

부엌마당, 안사랑채, 안사랑마당(현재 소실), 사당(2칸), 사랑마당의 다섯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가도와 비교해보면 안사랑채와 행랑채가 없어졌으며,

집 앞에 연못이 조성돼 있었음을 알수 있다.

안채는 중문을 통하여 사랑채와 이어져 있다.
 
한편 운조루는 지리산의 좋은 나무만을 골라 가려서 지은 집답게 재목이 듬직하다.

 사랑채 2칸은 가운데 기둥없이 지었는데, 이는 목재가 넉넉하지 않으면 감히 생각할수 없는 구조이다.

쪽마루도 통나무이고 딛고 올라서는 포석(鋪石) 조차 통나무로 하였다.

막돌을 비교적 차분하게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대청과 누마루를 두고 정남향한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기와지붕 너머로 안산격인 오봉산의 모습이 보이고 햇볕은 깊숙히 처마 밑으로 들어와 따사롭다.

사랑채와 대청과 누마루가 공존하는 것도 특이한데,

 (궁궐건축의 영향이라 볼수 있다) 공포와 같은 장식적 요소를 생략하여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다.


 

 

 

 

 

 

 

 

 

 

 

 

 

 

雲鳥樓의 10대 精神 - 류응교

1.나눔과 베품의 積善精神ㅡ他人能解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행랑채에 백미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당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음. 
그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음


2. 分數에 맞는 生活精神ㅡ隨分室

 아들이 기거하는 누마루에 수분실 이라는 현판을 걸고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생활 태도를 갖도록 하였음.


3. 風流의 精神ㅡ 時調 萬餘篇

 

 조선조말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자살을 했던 매천 황현 같은 시인 묵객들과 더불어

문우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경치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면서 대대로 써온 시조가 일만여편에 달함.


4. 人間尊重의 精神ㅡ 할머니 사랑방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안사랑채를 동편에 건축하였 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복원이 요청됨.

 


5. 記錄을 남기는 精神ㅡ 百年동안의 日記

 

 3대에 걸쳐 농가 일기와 생활 일기를 백년동안 기록하고 사회조직문서와 지세분정기를

자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하였음.

 

6. 善政을 베푸는 精神ㅡ 樂安郡守

낙안 군수로 재직 할 당시에 백성을 잘 보살피고 청빈하게 군수의 직무를 수행하고

다른곳으로 발령을 받고 새로운 부임지로 행차할 때 모든 군민이 길거리에 나와 엎드려 울며 못가게 붙들었다고 함

그 당시에 공적비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음.


7. 建築을 사랑한 精神ㅡ 水原華城

 

 수원 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성을 쌓을때에 정조의 마음 에 흡족할정도로 축성을 잘 하였다고 함.

당시에 정조는 신하들이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느니라 ] 하고 대답 하였다고 함.

필자의 7대조는 축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2계급 특진을 하였음.


8. 節槪를 굽히지 않은 선비 精神ㅡ 創氏改名反對

 

일본의 조선조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던 성씨 개명을 끝까지 반대하고

 선비로서의 절개를 굳건히 지킴.


9.父母와 祖上에 대한 孝道精神-제사지내는 일과 무덤 돌보는 일 

 

일기의 내용을 보면 조상을 섬기고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인점을 보면 대대로 효도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음.



10. 兼愛의 精神ㅡ 굴뚝을 낮게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함.

                   

[柳 應敎 ㅡ 전북대 교수 공박. 시인. 柳 爾胄의 8세손임]


 나눔과 베품의 積善精神ㅡ他人能解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행랑채에 백미 두가마니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당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음. 
그 마개에 '타인능해'라고 써놓았음

 

 

 

 

운조루가 유명한 것은 양반가의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어서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곳간채에 통나무 속을 비워 만든 쌀뒤주가 놓여있다.

뒤주 하단부에 가로 5㎝ 세로 10㎝ 정도의 직사각형에 ‘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능히 마개를 열어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본래 쌀뒤주는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 놓아두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운조루 사람들은 안채에서 떨어진 곳에, 그것도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뒤주를 놓고

 누구나 쌀을 빼가도록 했다. 그리고 쌀 두 가마 정도 들어가는 뒤주엔 쌀이 항상 채워져 있었다 한다.

쌀을 가지러 왔다가 없으면 낭패를 당할까 하는 염려에서다.

타인을 위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자들의 욕심을 꼬집는 말로 99석 가진 자가 1석 가진 자의 재물을 탐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운조루의 주인 유이주는 200여 년 전에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그 정신을 후손들에게 지키도록 유훈을 남겼다. 그

리고 구 후손들은 그 정신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것이 동학혁명과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운조루가 온전히 남아있는 이유이다.

나만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정신이

 숱한 시대의 격랑을 헤치고 견디게 한 비밀인 것이다.

 

뒤주를 침묵으로 보고 있으려니

지난 세월 동안 끼니를 잊지 못한 인근의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어린 자식들과 오순도순 밥을 먹는 모습이

그려져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全羅求禮五美洞家圖>

 

 <20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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