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덕수궁(德壽宮)

安永岩 2011. 7. 5. 15:51

근대 한국의 원(原)공간

덕수궁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였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쳐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써 큰 역활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의 외교사절의 공간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정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 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1.대한문 일원  2.중화전 일원  3.즉조당 일원  4.함녕전과 덕홍전  5.정관헌

6.석조전 일원  7.궐내각사 터와 환구단  8.선원전 터 일원  9.중명전 일원

 

 

대한문 일원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대한제국, 근대 세계를 향해 문을 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仁化門이었다. 그런대 東門이었던 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직적인 정문 역활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大漢門上樑門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나와 있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행차로였다.

 

 

 

 

       금천교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행차로였다.

 

대한문,금천교지나 중화문 가는 길

 

 

중화문 가는 길 옆 덕수궁 돌담길

 

 

 중화전 일원

 

中和門

 

 

 

 

 

중화전 中和殿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궁궐의 으뜸 전각

중화전은 경운궁의 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여한 후 5년  남짓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중층의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이때 중화전 행각 128칸과 중화전, 朝元門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재건하면서 당시의 어지러운 시국과 궁핍한 재정 상황으로

인해 단층으로 축소되어 건립되었다. 중화전을 둘러싸고 널찍한 마당,朝廷을 형성했던 행각들은

고종 승하 후 대부분 헐리고 동남쪽 모퉁이 부문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추측할 뿐이다.

 

 

 

 

 

 

中和殿은 이중 월대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踏밟을답,道)에는 조선 궁궐의

정전 중 유일하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는 모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대한제국 출범 후 지어진 건물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오르는 계단 답도에 새겨진 두 마리 용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전앞에서 본 마당과 중화문

 

 

중화전 내부 모습

 

헤이그 밀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양위

고종은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기자들 앞에서 연설하는데 그쳤으며 열강들의 냉담한 반응에

이준열사는 귀국하지 않고 순국하여 대한제국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 일로 일제는 고종에게 여러 차례 양위를 강요하였고,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제는 세자가 대신 정무를 보는 대리청정을

양위로 바꾸어 그 양위식을 1907년 7월 19일 중화전에서 치른다.

고종과 순종은 양위식 참석을 거부했다.

 

 

어가 천정에 새겨진 용문양

龍은 황제를 상징한다.

 

 

구 한말 궁궐과 현대 삘~딩 모습

 

 

 

 

 

중화전 뒷편

 

 

드므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즉조당 일원

 

 

덕수궁의 原의 공간

즉조당卽祚堂(우측으로부터,석어당,즉조당,준명당) 일원은

중화전 뒷편에 위치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이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석어당昔御堂은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 2층 건물로 단층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인조 즉위 후 경운궁 전각을 대부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었으나,

이 두 건물만은 보존되어 후에 경운궁의 중심이 되었다.

준명당浚(밝을준)明堂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었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에 소실된 후 같은해에 중건된 것이다.

 

 

 

 

 

석어당(昔예석,御어거할어, 堂집당)

덕수궁에서 유일한 목조 2층 건물로 단층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西宮 유폐와 인조반정의 현장,석어당

석어당은 선조의 계비인 임목왕후 김씨가 10여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임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 때 경운궁은 西宮으로 불렸다. 서궁유폐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는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서 광해군을 꿇어 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새를 전하였다.

 

 

 

 

 

즉조당(卽곧즉,祚복조,堂집당)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선조가 거처한 건물이다.

구 한말 고종황제가 5년여를 거쳐하면서 유달리 애착을 가진 건물였다.

 

 

 

즉조당 뒷편의 삘~딩의 의미는...

불과 100년전의 일제 침략의 야욕에 치를 떨어야 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나쁜놈들...

지금도 반성은 커녕 자꾸만 나쁜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

 

 

 

 

卽祚堂 편액은 고종의 친필이다.

 

 

 

즉조당 내부 모습 과 문양

 

 

 

즉조당 아궁이

 

 

 

준명당(浚깊을준,明밝을명,堂집당)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준명당앞에 오래된 향나무

 

 

준명당과 즉조당이 이렇게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준명당에서 본 세 건물,석어당이 앞으로 나와 있다.

 

 

 

 

석조전 일원

 

근대국가의 상징, 석조전(石造殿)은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하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로,돌계단을 올라 들어서는

1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로,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쳐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고종황제 승하 후에 덕수궁이 황폐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회화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1938년에 서측 별관이 들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조전 앞의 분수

석조전 앞에 있는 정원과 청동제 분순는 서구형 정원으로 1938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뒤에 배치하여 후원이라 하는 데 반해, 석조전은 건물 앞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리의 전통 조경에서는 분수를 찾아 볼 수 없는데, 이는 한국인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여겼기에, 정원에 인공으로 폭포를 만들긴 했지만 물이 역으로 치솟는 분수는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1938년에 석조전 서측에 들어선 별관. 현재 덕수궁미술관

 

 

덕수궁미술관과 석조전.그리고 정원

 

 

미술관에서 본 중화전

 

 

석조전 앞에 있는 해시계 와 분수

 

 

석조전은 현재 1909년 모습으로 복원중이다.

 

 

 

덕수궁미술관에 미국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덕수궁미술관과 석조전사이 연결 복도

 

 

 

 

 

 

광명문,光明門

원래 광명문은 침전인 함년전의 남쪽 대문이었다.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내부에는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물시계 자격루(국보 제229호) 와 1462년에 제작된 정릉동 홍천사의 동종

(보물 제1460호)과 화약을 이용하여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인 신기전기화차등을 전시하고 있다.

 

 

보루각 자격루,報漏閣 自擊漏

국보 제229호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에 만든 물시계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물시계에 연결하여 저절로 움직이고

시각을 알리는 자격루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표준 시계로 썼다.

보루각 자격루는 세종 때의 자격루를 중종 때 유전(柳專) 등이 개량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정밀하고 복잡한 시보장치는 없어지고

3개의 물그릇과 2개의 물받이통만 남아 있다.

이것은 세종 때 자격루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물시계라는 점에서 귀중한 과학문화재이다.

 

원래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자동장치와 그 밖의 장치들은 그 전에 없어졌다.

 

 

 

 

흥천사 종(興天寺 鐘)

보물 제1460호

홍천사는 태조(이성계)가 1397년(태조5년)에 계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貞陵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1409년(태종9년) 정릉이 도성 밖으로 옮겨지고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 난 후에 홍천사는 왕실의 원찰로 1510년(중종5년)까지

남아 있었다.  이 홍천사 종은 1462년(세조8년)에 만들어 내걸은 종이다.

1510년(중종5년) 흥천사가 불타면서 1747년(영조23년) 경복궁의 광화문으로

옮겼다가 창경궁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보관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범종에 속한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신기전은 고려 말 최무선이 만든 주화(走火)라는 무기를 세종 30년(1448)에

개량한 것으로 대나무 화살의 앞부분에 쇠촉을 달고 그 뒤쪽에 원통형의

종이 약통을 부착하여 불을 붙이면 발사하는 병기이며

한번에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는 위력적인 병기였다.

 

 

덕수궁 부제들 - 광명문 뒷편에  있다.

 

주목

 

중화문 앞

 

덕수궁 석조전 앞

 

석조전 가는 길 은행나무

 

 

 

 

 

 


 

처진 벚나무

 

은행나무

덕수궁은 특히 노오란 은행잎이 지는 11월에 가면 詩心이 절로 나온다. 

 

 


 선원전 터 일원

 

 

 

선원전 터(璿아름다운옥선,源殿址)

대한제국 영욕의 현장

1897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이 된 경운궁은

예원학교와 덕수초등학교,옛 경기여고 터를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으나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궁역이 해체되면서 오늘의 덕수궁 영역으로

축소되었다.현재의 석조전 뒤편에는 돈덕전(惇德殿)이 있었다.돈덕전은 순종이

즉위한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1922년 궁역 해체와 동시에 관통도로가 생기면서

철거되었다. 그 뒤 담장 너머로 선원전 일원의 궁역이 있었다. 선원전은

태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1900년에 숙종을 비롯한

 7위의 초상을 모셔서 황실의 격을 갖추었다. 그 일대는 초상 때 관을 모시는 빈전

(殯殿)과 신주를 모시는 혼전(魂殿)이 있어 황실의 제례를 지내던 곳이다.

현재 경기여고 터에 선원전을 비롯한 덕수궁 복원작업이 준비중이다.

 

정관헌 일원

 

 

전통 건축과 서양 건축의 조화

정관헌靜觀軒 

 

정관헌靜觀軒은 그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조용히 궁궐을 내려다 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위치도 함녕전 뒤에 자리 잡고 있어 전통 궁궐에서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샤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박쥐,꽃병 등 한국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처음 커피 맛을 보고 그 맛에 반하여 이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커피와 고종 독살미수 사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았는데 경운궁으로

환여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 즐겼다. 1898년에 커피와 관련 고종 독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김홍록이란 자가 하수인을 시켜 고종과 황태자가 즐겨 마시는 커피에 독을 넣은 것이다.

김홍록은 역관 출신으로 아관파천 때 고종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했으나 통역을 빙자해 국정을

농단한 것이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았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

다행히 고종은 입에 품었던 독차를 뱄었지만 이미 한 모금 마신 황태자(뒤의 순종)는

그것을 토했음에도 그 여독으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정관헌 내부

 

 

내부 서양식 석재기둥과 바깥에 전통한국식 나무기둥들...

 

기둥 상부 꽃병,박쥐문양

 

함녕전에서 정관헌으로 올라 오는길

 


함녕전과 덕홍전 일원

 

함녕전 들어가는 길,입구

 

함녕전 우측 담장

 

 

황제의 침전과 접견실

함녕전(咸寧殿)과 덕홍전(德弘殿)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 이곳에서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었다.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건물이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惟賢門)과 장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홍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했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함녕전(보물 제820호)

 

함녕전에서 시작된 경운궁 대화재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경운궁은 거의 잿더미로 변하였다.

당시 일본측 언론에선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불을 잘못 때어

나무 기둥에 불이 옮겨 붙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온돌의 구조적 특성상 고열되었다고 해서

기둥에 불이 옮겨 붙기는 어렵다는 점,바람이 거세었다고는 해도 그 피해 범위가 너무나 넓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일제에 의한 방화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각국의 공사관 사이에 위치한 경운궁에 고종이 기거하는 것을 일제가 못마땅했다는 점도

방화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고종은 불이 난 후 다른 궁궐로의 이어 권유를 물리치고

다음날부터 재건 공사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김구의 목숨을 살린 함녕전 대청전화

1897년에는 고종의 침전과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다.

함녕전의 대청마루에 전화가가 설치되자 고종은 필요할 때마다 전화기로 대신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전화를 '대청전화'라고 했는데  대청전화 덕분에 김구가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진 일화가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고종이 김구의 사형집행 서류를 검토 중 형집행 직전에 전화로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함녕전 입구

 

함녕전 대청마루


 

덕홍전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 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천장의 봉황문양의 단청

 

천장의 샹들리에

 

 

덕홍전과 석어당 사이의 출입문이 있는 담장 모습

 

정관헌에서 후원가는길

 

 

 

 


함녕전 뒤 정원

 

후원가는길 -  정원

인근 삘딩 사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나온 넥타이 부대들이 많이 보였다.

문만 나서면 푹푹 찌는 아스팔트,차량행렬,삘딩 숲에서 지친 도시민들의 휴식처로

여기만한 곳이 또 있을까?

 

 


 


서울 도심 한 가운데 높은 삘~딩속에 에워 쌓인 덕수궁은

서울 시민들에게 그나마 산소를 제공하는 청량제 역활을 한다.

실제로 덕수궁을 나서는 순간 부터 숨이 턱~억 막히는 느낌이 바로 왔다.

다시 덕수궁 숲속으로 들어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궐내각사 터 와 환구단

 

 

 

이 숲 일대와 담장 너머 시청 앞 서울광장 일부는 궁궐 안 관청들이 있던 궐내각사 터이다.

국가의 군사권을 관장하던 원수부와 황실의 업무를 보던 궁내부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강원,태의원,전화국 등 여러 관청이 있었으나, 태평로 개설 때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절반 이상의 전각들이 사라졌다. 담장 안의 나머지 전각들은 1933년에 공원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서울 광장 너머에 세운 환구단은 1914년에 철도호텔을 지을 때 파괴되었으나,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와 돌북(石鼓)이 남아 대한제국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황제국 선포를 하늘에 고한 

환구단 황궁우(皇穹宇)

사적 제157호

환구단은  돌을 쌓아 올린 3층의 거대한 원형 제단이었으며,신위를 모신

부속 건물 황궁우를 비롯하여 긴 담장과 사면의 홍살문까지 갖추었다.

1층의 지름이 140m인 엄청난 규모여서 1000여 명의 숙련된 인원이

거의 한 달 동안 쉴 새없이 일해서 완성했다. 환구단은 1914년 조선철도호텔

건설 때 파괴되었으나,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와 돌북(石鼓)이 남아 있어

대한제국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돌북(石鼓)

돌북에 세겨진 용문양 조각예술이 구한말의 섬세한 조각품으로 

 마지막 걸작품이 아닌가 싶다.

 

서울시청과 서울광장

 

1920년대 사진 한장

옛 서울시청과 환구단 모습.

환구단의 규모가 엄청나게 컸는데 일제에 의해 개발이란 미명하에

다 철거 되고 황궁우만이 남게되었다.언제 쯤에나 복원이 될까?

 

연못(대한문 들어와 우측에 있다)

 

 

나오면서...

 

덕수궁 돌담길

 

돌담길에 전시되어 있는 액자들...

우측 손이 없는 사람이 직접 의수를 끼고 조각한 작품들인데

아마 판매를 하는 것 같았다.아래 글귀는  그 작품중 일부분...

 

 

 

 

 

< 2011,6,15, 水 >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오면서 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