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安永岩 2012. 9. 6. 02:10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황복사터에 있는 석탑이라고 해서 '황복사지삼층석탑'라고 하는데

문화재 정식 명칭으로는

'경주 구황리삼층석탑(慶州 九黃里 三層石塔)' 라 부르며

보물이 아닌 국보로 그것도 제37호입니다.

아마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해서

구황리삼층석탑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석탑이 중요한 것은

 1943년 이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여래입상과 금동사리함이 나왔는데

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로 국보 제79호이며,

여래입상은 높이 14cm로 국보 제80호이다.

이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황리삼층석탑에는

국보가 3개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국보 100위 안에 말입니다.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 九黃里 三層石塔) 국보 제37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79

-경 구황동 금제여래입상(慶州 黃洞 金製如來立像) 국보 80

 

 

참고로 여래좌상,입상을 올릴께요.

 

여래좌상  (국보 제79호) 높이가 12.2cm

 

여래입상 (국보 제80호) 높이가 14cm

 

  손바닥 만한 크기이지만 금제불상으로 문화적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경주국립박물관이 아닌 서울에...

왜 서울에 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당연히 경주로 와야지요.

 

 

 이 석탑은

높이 7.3인데 이중(二重) 기단 위에3층으로 쌓아 올린 통일신라시대 탑입니다. 

사리함 뚜껑의 안쪽면에 있는 장문의 명문(銘文)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孝昭王)이 부왕인 신문왕(神文王)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하네요.

효소왕이 누굽니까?

조상을 잘 만난 덕에 태평성대를 누린 임금입니다.

 

 

족보를 볼까요?

신라 성골출신 임금으로 28대 진덕여왕을 끝으로 끝나고

진골출신 김춘추가 왕 위에 오르니 그분이 제 29대 태종무열왕입니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더불어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문무왕은 선대의 영향으로 삼국을 통일합니다

문무왕의 아들이 신문왕,그 아들이 효소왕인데

이때는 전쟁도 없이 태평성대의 세월을 보냅니다.

모두가 효자입니다.

신문왕은 부왕(문무왕)을 위한 감은사를 지어 명복을 빌고

부왕이 잠들어 있는 감포 앞바다에 이견대를 세워 매일 같이

부왕을 바라 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 했고,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은 황복사 삼층석탑을 세워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네요...

 

 

황복사터삼층석탑은

황룡사터가 마주 보이는 낭산 동쪽 기슭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 너른 논 끝자락에 진평왕릉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드시 경주에 낭산은 신라에서는

매우 신령시 했던 성스러운 산였습니다.

선덕여왕릉이 있고 문무왕의 화장터인 능지탑이 있고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고 호국사찰 사천왕사터가 있으며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거문고 백결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이 공부한 독서당이 있었다지요.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 비해 규모가 많이 작지만

국보(제37호)로서는 앞서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여기서 출토된 또 다른

국보급 불상이 2점이나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저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신라는 불교국가 답게 참으로 사찰이 번성했습니다.

거찰였던 황룡사,분황사,황복사가 모두 지척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라=불교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신라의 사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요

전국의 유명 사찰은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2012,8,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