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여행]경주 최부자의 혼이 살아 있는 충의당(忠義堂)

安永岩 2018. 8. 18. 20:40

경주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을 이야기할 때,그리고 한국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항상 첫손에 꼽히는 최부자집.세상이 각박해지고 '우리'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질수록 진정한 나눔에 대한 목소리는 커진다.

소박하면서 정갈하고,아담하지만 위엄이 서린 충의당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눔의 정신을 계속 실천해오고 있다.

하지만 충의당의 주인이었던 조선시대 무인 최진립(崔震立,1568~1636,시호:정무공(貞武公)장군을 단순히 경주 최부자의 원류라고만 

기억하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참전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충과 의 역시 

그가 시대를 초월해 후손에게 전하고자 했던 정신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고택,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아름다운 의무가 시작된 공간,

그리고 그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집,충의당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경주 충의당(忠義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


충의당은 크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단정하고 반듯한 공간들은 최진립 장군의 고매한 인품을 반영이라도 하듯 기단이 낮고 화려하지 않으며 건물의 위세를 뽐내지 않는다.

그곳에 살던 사람,그리고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의 유명세에 견주어 보면 굉장히 겸손한 모습이다.

15대손 최채량(崔採亮)씨는 말한다.

"최부자가 백 년 동안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많은 이들을 도운 곳,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최부자 정신과 가훈들 역시 모두 이곳에서 최진립 장군에 의해 시작된 것들이지요"  

그래서인지 충의당은 오랜 역사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역시도 오직 청렴과 근검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았던 집안의 내력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최부자의 정신이 베어 있는 충의당 주변을 공원화하여 찾아 오는 사람들이 편안히 쉬어 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위압감을 주는 솟을 대문이 아니라서 좋다.

최부자 정신이 깃든 그저 나즈막한 여느집 대문이다.



세상이 다 아는 최부자인데 한옥스테이를 한다.

1박하며 최부자의 정신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나를 돌아 보고 사는 것의 의미를 깨우고 싶다.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당이 있고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다실로 사용되는 경모각(景慕閣)과 충의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사랑마당,충의당 앞 마당



좌)충의당, 우)경모각

경상북도지정문화재 민속자료 제99호


충의당

좌측은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으로 꾸미고,우측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우물마루:마루의 형식이 우물정(井)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물마루라고 지칭한다. 

우물마루



보이는 산은 경주 남산이다.




충의당 뒤로는 흠흠당,우산초려(遇山草慮),안채인 잠와(潛窩)고택이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뒤편 안채로 가는 좌측편에 있는 민속자료실,여러가지 옛 민속생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옆으로 보이는 산은 경주 남산이다.




충의당 뒤로는 우산초려(遇山草慮),안채인 잠와(潛窩)고택, 흠흠당이 안마당을 둘러싸고 자리 잡아 

부분적으로 열린 ㅁ자형의 전형적인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배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좌,우산초려, 가운데 잠와고택(안채),그리고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우측은 흠흠당

우산초려는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최근에 기와지붕으로 바꾸었다.

맞은편 흠흠당에 비해서 좀 더 소박한 느낌을 주며 편리한 숙박을 위해 독립된 욕실과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




잠와고택(안채)



흠흠당(欽欽堂)


흠흥담은 원래 충의당의 당호였으나 사랑채의 이름이 충의당으로 바뀌면서 중사랑채에 흠흥담이라는 당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안채로 보이는 문은 뒤문이며 앞쪽은 마루가 있는 동쪽이다.사당을 바라 보고 있어서 고즈넉한 느낌을 주며 전통 한옥에 걸맞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우산초려(愚山艸廬) 현판(최진립 장군 15대손 崔採亮 선생글씨)

우산 선생은 '충의당 3대서예대전'을 개최할 만큼 서예대가이시고 진정한 교육자이시며 경주의 자랑입니다.






사당



사당은 전면에 툇마루가 딸린 맞배지붕으로,상부구조물은 민가의 사당으로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 출입문 옆에 자라고 있는 고목 사철나무


충의당 사랑마당




-충의당을 방문하면 꼭 보아야 할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충노비(忠奴碑)고 다른 하나는 회화나무이다.


충노비(忠奴碑)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서려 있는 충노비와 회나무


충노비는 말 그대로 충성을 다했던 노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병자호란 당시,용인전투에서 죽음과 마주하게 된 최진립 장군이 평생에 걸쳐

자신을 따르던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라" 라고

명했지만 이에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거늘 어찌 저희가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물으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한다.

그 뒤로 이곳 충의당에서는 최진립 장군에게 제를 올린 후 그대로 상을 물려

두 노비를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신분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양반들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집안의 전통이 되었답니다.


두 忠奴는

기별(奇別)과 옥동(玉洞)이다.





400살 회나무


회나무는 집에서 대문을 나서면 왼편으로  보이는데,최진립 장군께서

직접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신기한 것은, 이 나무가 1905년 고사(枯死)했다가 

1945년 갑자기 살아 났단는 것이다.한반도가 일본에 점령당한 후 다시 해방된

연도와 일치한다.우연치고는 참으로 기이한 우연이다.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여러 번불에 탄 이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푸른 잎을 틔웠다는 애기를 듣게 되면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회나무



회나무는 큰 키를 자랑하는데

여기 회나무는 키가 나즈막한게 돌연변이 느낌입니다.

아마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서 그런 것 같네요

대신 나무가지의 번식은 대단한 수세를 자랑하고 있네요



충의당 회나무

볼수록 신비감이 느껴지는 신령스러운 나무입니다.


이제 충의당당의 관람을 마치고 주변을 돌아 봅니다.

담장 아래 맨드라미 꽃도 오래만에 봅니다.


충의당 배롱나무





충의당 앞에 조성된 충의공원



정무공 최진립 장군 상





활인당(活人當)

충신 정무공 최진립의 손자 崔國璿이 문중과 협의하여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는 신념으로

이조리 동네 어귀에 초가집을 짓고 곳간을 열어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율하니 

사람들은 이곳을 일컬어 활인당이라고 하였다.

이는 경주 최부자의 상생과 나눔 정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최부자집이 교촌으로 이사한 후에도 계속하였고,

6.25동란 시 최부자집 앞 공터에 솥을 걸어 죽을 쑤어 피난민을 구휼하였다.

후손들은 선대의 상생정신을 누대로 계승 실천하여 경주 최부자의 명성을 이어왔다.










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는 조선 최고의 부자로 통했던 경주 최 부잣집이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은 조선 중기(1600년 초반)부터

후기(1900년 중반)까지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유지했다.

부를 유지하면서도 이웃의 존경을 받았다.

 최 부잣집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훈 때문이다.

 최 부잣집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었다.

권력을 탐하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라는 내용의 육훈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높은 도덕적 의무)’다.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은 모으지 말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등을 담고 있다.


육연은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유사감연(有事敢然·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등이다.

  

최씨 가문은 이 가훈을 몸소 실천했다. 

흉년에는 곳간 문을 열어 이웃을 구제했다. 

1950년에는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모든 재산을 기증했다.

최씨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최 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종판’이었다.

그는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한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