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안동여행]농암종택(聾巖宗宅)

安永岩 2018. 9. 17. 22:39

청량산 축융봉을 오전에 산행하고 고산정을 걸쳐 농암종택으로 갑니다.

퇴계선생께서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즐겨 걸었다는 길입니다.

낙동강 상류의 물길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특히 낙동강 700리 물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기에 더욱 기대가 큽니다.

예전에 청량산을 오가며 부근부근 경치를 감상하기는 했지만 홀로 조용히 간섭 안받고 보기는 첨이라 쉬엄쉬엄 볼까 합니다.

최근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촬영지로 유명한 고산정은 그 중에 가장 백미였습니다.

고산정에서 농암종택까지의 S字로 흘러 가는 낙동강 물길 따라서 기암괴석과 소나무,넓고 하얀 백사장,여유로운 물결...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좋습니다.

이윽고 강기슭 드넓은 곳에 남향으로 포근히 앉은 농암종택에 닿았습니다.

농암고택 앞의 풍경이 너무 비경이라 어쩜 이런 멋진 곳에 터를 잡았을까?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기암괴석,푸른 소나무들,유유히 흘러 가는 낙동강,하얀 백사장...

그 속을 들어 가 봅니다.

원래 농암종택은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막으면서 수몰위기에 처하자 후손들이 이 곳에 터를 잡고

건축물들을 하나 하나 이건(移建)하였다고 하네요.


농암종택(聾巖宗宅)

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 이현보의 종택입니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지요.
농암종택이 있던 곳은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하지만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전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이곳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으며,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지요.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입니다. 

이웃에 청량산도립공원,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지와 볼거리가 많습니다.



농암종택 솟을대문


활짝 열어 놓은 문 좌우로 농암선생의 이력과 퇴계오솔길(예던길) 생태탐방로 안내도가 비치되어 있어 읽어 보고 들어 갑니다.

퇴계선생이 아름다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청량산까지 즐겨 오가셨단다.나도 걷고 싶다.

무엇보다도 낙동강 700여리 길 중에 이 곳이 가장 경치가 좋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청량산 산행 후 낙동강을 따라 그림같은 고산정 풍경을 즐기고 이 곳 가송리 농암고택까지 오는데 경치가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너무너무 좋아 어쩔줄 모르겠다.

특히 흰모래,기암괴석,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풍경들이 비경이다.


 

별채와 긍구당

여기서 보는 앞쪽 풍경이 절경입니다.



농암종택의 안내도



사랑채 내실

마당보다 높게 지어 앞쪽 풍경이 잘 보이도록 지었네요

사랑채는 내실,객실,안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 내실에 걸린 선조어필,積善(적선)



사랑채에서 바라 본 낙동강 벽력암


별채와 긍구당

낙동강의 기암괴석과 그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 물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위치해 있어 농암종택에서 가장 위치가 탁월합니다.



사랑채 안채


농암종택의 한옥스테이를 하는 사랑채입니다.

조용하게 자연과 벗하며 하룻밤을 유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랍니다.




긍구당(構堂)


농암 이현보의 종가 서쪽에 위치한 별당입니다.

고려말 이헌이 처음 건립하여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농암이 중수하여 긍구당(肯즐길긍,構堂)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L'자형 집이다.

규모가 직고 꾸밈이 없어 단조롭지만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습니다.

특히 앞쪽 기암괴석 비경의 낙동강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2호

  


명농당(明農堂)


역시 분천에 있던 건물을 이 곳으로 이건하였다.

원래는 초가였다고 한다. 





분강서원 과 명농당(우측)




분강서원 안내도




분강서원(汾江書院)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 는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이흠(李欽)의 아들로 안동 도산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때 중종임금과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소매를 뿌리쳐 거절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가에서 배를 탈 때 배에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전사옹(田舍翁)으로 자처하며 집 앞 시냇가에 배를 띄우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이 농암을 신선으로 여겼다.

특히 농암은 송재 이우를 비롯하여 그 조카 퇴계 이황과도 대를 이어가며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농암의 벼슬은 비록 참판에 그쳤으나 품계는 명종 치세때인 1549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명종실록 이현보의 졸기에서는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여 으뜸으로 친다고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나라 래자에 비견되었고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고을의 80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聾巖)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위키백과참조>







농암 신도비(聾巖 神道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64호

이 비는 조선 명종 20년(1565) 2월에 세워진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신도입니다.



낙동강 벽력암


이제 농암선생의 별당건물인 애일당으로 갑니다.

낙동강 물줄기가 휘돌아 가는 언덕 학소대 옆에 세운 별당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낙동강 벽련암과 학소대


낙동강따라 걷는 퇴계오솔길을 나도 걸어 보고 싶다.

특히 청량산에서 도산서원 앞까지,

언제일까?그 날이~







농암선생의 별당 애일당(愛日堂)과 강각(江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이 건물은 농암선생의 별당건물이다.

조선 중종 7년(1512)에 부친과 숙부께서 경노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네요.

당호(堂號)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분강(汾江)과 의촌이 내려다 보이는 농암이라 불리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들이 있었는데 

2005년 이 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합니다.  


애일당(愛日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강각(江閣)





농암각자(聾巖刻字)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3호


江閣(강각) 옆에 놓인 바위는농암각자(聾巖刻字)로 

앞면을 다듬은 네 개의 자연석 암벽에 '농암선생전대구장' 이라고 두 글자씩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도로개설로 인하여 농암선생의 정자인 애일당(愛日堂)을 영지산 윗쪽으로 이전하면서 

처음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겨 놓은 것이다.

원래 분천리 옛 애일당터에 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글자부분만을 잘라 옛 애일당 아래로 옮겼다가 2005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고 합니다.


'농암'은 원래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바위 이름이었는데 훗날 이것으로 호를 삼았다.

그는 혼란했던 세상 속에서 이 바위처럼 귀먹은(聾)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다.농암은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농암)위에 애일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75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농암이 있던 분천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이 곳 분천에서 삶을 마쳤다.


聾巖


先生


亭臺


舊庄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농암각자 뒤면 모습



강각

강각 누마루에 올라 앉아 앞에 낙동강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 그 소원을 풀지 못했다.

 



학소대


벽력암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고산정'은 최근에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미스터션샤인 촬영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요. 


이 곳 농암종택 앞의 학소대,벽련암의 경치에 홀딱합니다.

너무 좋은 비경에 오지 않았드라면 후회할 뻔 했습니다.

특히 여름철 어린애 동반 가족 물놀이장으로 짱입니다.

단 큰 물 때는 NO,입니다.

오늘처럼 유유자적 흐르는 강물은 놀기에 너무 좋네요

실제 제가 간 날도 일부 가족들이 물놀이를 하고, 쉼의 시간을 갖는 가족들이 있었답니다.

벽련암 암벽 꼭데기 정자에는 무슨 행사를 하는지 시끌뻑적했답니다.


또한 모래사장이 희고 부드럽고 너무 깨끗합니다.






이제 농암종택을 떠납니다.

언제 다시 와질지~아마도 퇴계오솔길(예던길)을 걷는 기획이 되면 와질것 같네요.

참고로 탐방로 안내도와 농암선생의 초상을 올립니다.

그리고 농암선생이 말년을 보낸 농암바위,애일당,강각이 그려진 분천헌연도도 함께 올립니다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