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安永岩 2011. 4. 8. 00:18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松廣寺)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寺)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

〈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체징(體澄)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改名)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懶翁)·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覺雲

무학(無學)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義湘)의 법계도(法界圖)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국사전(國師殿:국보 제56호)·하사당(下舍堂:보물 제263호)·

약사전(藥師殿:보물 제302호)·영산전(靈山殿:보물 제303호)·청량각(淸凉閣)·척주각(滌珠閣

우화각(羽化閣)·천왕문·해탈문·대장전(大藏殿) 등 50여 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송광사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고려문서(高麗文書:보물 제572호)·경패(經牌:보물 제175호)·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제176호) 등이 있으며

1093년 간행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

1095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제206호)과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영산전목불좌상 등이 있다

 

 

조계산 송광사 입구

 

 

송광사 매표소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광사 계곡에도 봄이 내려 앉다.

 

 

송광사 앞에 서 있는 하마비

송광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

 

 

송광사 일주문 앞

 

 

송광사 공덕비

 

 

송광사 앞에 있는 낙하담에 걸린 등들

 

 

송광사 일주문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 우화각 앞

좌측이 송광사 경내이고 곧장가면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로 간다.

2년전 늦가을에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해서 선암사로 넘어 갔는데...

얼마나 멋진 길이였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송광사는 멋은 우화각과 홍예가 아닌가 싶다.

 

 

우화각,羽化閣 과 홍예,虹霓(무지개다리)

 

우화각은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가는 연못 위의 홍교(무지개 다리)가 삼청교(일명 능허교)이며

그 위의 건물이 우화각으로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경내는 바로 이 우화각,능허교를 통하여 들어 간다.

 

홍예,능허교에서 본 상부 계곡의 봄풍경.조계산에서 내려 온

계곡물이 삼청교앞으로 흘러 내려 간다.

사진사들이 가장 줄겨 담는 송광사 풍경인데

나는 가을에도 좋지만 봄의 풍경이 더 좋다.

능허교 위레서 본 아래 풍경

얼마전에 끝난 '추노'드라마에서 물속 촬영 현장이다.

조계산에서 흘러 들어 온 물을 인공보를 만들어 잠시

머물어 가도록 하였고 보이는 누각이 '임경당'이다.

주변과 어울러 역시 경치가 좋은 곳이고

마음의 안식처를 삼기에 좋은 곳이다.

 

 

송광사 종각

 

 

송광사,松廣寺,Songwangsa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 해온 유서 깊은 고찰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송광산 길상사라고 하였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의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16분의 국사가 주석했던 선종사찰로,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사찰로 여겨지고 있다,그 동안 정유재란

및 임인년(현종 8년 : 1842년)의 대화재,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42호),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하사당(보물 263호),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등을 비롯해 총 8천

여점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송광사 소개 책자에서>

 

 

여느 사찰의 대웅전보다 웅장하고 건축미가 돋보이는  '대웅보전'

아,亞자형으로 지어진 秀作이다.

 

 

 송광사 대웅보전,松廣寺 大雄寶殿

 

지금의 대웅보전은 1951년 소실 후 1988년 송광사 8차 중창 당시 다시 지어졌다.

대웅보전에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며,각 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보현보살,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시고 있다.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의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승보전,僧寶殿

 

승보전(僧寶殿)은 대웅보전 옆에 있다.

1988년 제8차 중창 이전에는 대웅전으로 사용되어

당시만 하더라도 절의 중심 전각이었다.

이름 그대로 승보 사찰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몇 차례 소실되었다가 최근에는 1961년에 중창되었다.

안에는 석가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난·가섭 등 10대제자와 16나한,

그리고 1250대비구를 모셨다고 한다.

 

리고 승보전 옆에는 대중들의 공양 때 밥을 담았던

 목조 ‘비사리 구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비사리 구시는

쌍향수(雙向樹)·능견난사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 중 하나로 꼽힌다.


 

※승보전 외벽에 심우도(尋牛圖)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차후에 다시 갈 기회가 주워지면 여기에 올릴까 합니다.

심우도(尋牛圖) : 마음의 소,깨달음의 과정을

벽화로써 잘 나타 나 있다.

 

지장전,地藏殿

 

본래 명부전으로 지장 보살과 시왕을 봉안했다가 제8차 중창 때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늘려지었다.

안에는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무독귀왕, 각 10체씩의 시왕상과

동자상, 그리고 시왕탱 및 사자도 2점을 봉안했다.

 명부세계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은 선·교의 구별 없이

정토신앙의 대표적 귀의처로서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법정스님 입적시 분향소로 사용했으며 다비후 유골을 모셔 놓았다.

법정스님,法頂과 송광사 ! 뗄래야 뗄수 없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곳곳에 법정의 혼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리고 사중의 천도제를 대부분 이곳에서 지낸다. 

 

 

송광사 지장전 벽화(부모은중경)

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한다.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준 은혜, 해산 때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쓴것을 삼키고 단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젖을 먹여 기르는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해 주시는 은혜,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당하는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의 10대은혜(大恩惠))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러한 서술은 생리학적 측면에서 보아 매우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밖에 《효경(孝經)》이 효(孝)를 강조한 데 비하여, 이 경전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널리 보급되었고, 나라마다 여러 가지 유통본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삽화를 곁들인 판본이 많이 간행되었고, 중기 이후에는 언해본도 간행되었다.

현존 최고의 판본은 1381년(우왕 7)에 간행된 고려본이며,삽화본 중에는 정조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김홍도(金弘道)로 하여금 삽화를 그리게 하여 개판한 용주사본(龍珠寺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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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탐수호은

첫째는 뱃 속에 품고 지켜주신 은혜이니

여러 겁에 인연이 지중해서 금생에도 모태에 의탁했네.

달이 차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달 이레에는 육정이 완성된다.

몸은 둔해 산같이 무거우니 앉고 설 땐 풍재인양 아찔하다.

비단옷은 걸쳐볼 생각조차 없고 경대에는 먼지만 자욱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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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임산수고은

둘째는 낳으실 때 고생하신 은혜이니

잉태한 지 열 달이 차고 나면 그 고통은 저승의 문턱이라.

 아침마다 중병을 치룬 듯하고 매일같이 까무라친 사람 같네.

두려움은 기억조차 할 수 없고 근심은 눈물되어 옷깃을 적시도다.

시름에 겨워 친척에게 이르는 말이 살아남지 못할까 걱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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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생자망우은

셋째는 해산한 뒤에 근심을 놓으신 은혜이니

어머니가 그대 낳던 날 오장은 온통 찢기었나니

몸도 마음도 까무라치고 흘러내린 피는 도수장 같았다.

그러고도 아기 건강탄 말 듣고 기뻐함이 평시의 곱이나 된다.

기쁨은 잠시요 슬픔이 다시 오니 산후의 고통이 간장을 에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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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고토감은

넷째는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아서 먹여주신 은혜이니

부모의 은혜는 깊고도 무거워라 보살펴 주는 일 때를 잃지 않는다.

단것은 뱉아서 자시지 않고 쓴것은 삼키되 찡그리지 않는다.

애정은 무거워 숨길 수 없고 은혜는 깊어서 차라리 서럽다.

아기 배 부르기만 바랄 뿐 당신의 시장함은 사양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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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건취습은

다섯째는 젖은 데로 누으시고 마른 대로 뉘여주신 은혜이니

어머니 자신은 온통 젖었어도 아기는 마른 데로 골라 누인다.

두 젖으로는 아기 배를 채우고 고운 옷소매로는 찬바람 가려준다.

아기 보살피기에 단잠을 설쳤어도 귀여운 재롱에 기쁨으로 변한다.

언제나 아기의 편안함만 바랄뿐 자신의 고달픔은 생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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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포양육은

여섯째는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어머니의 사랑은 땅에 견주고 아버지의 은혜는 하늘에 비기니

하늘 땅의 은공이 균등하듯이 부모님의 은혜도 그러하여라.

두 눈이 멀었어도 개의치 않고 팔다리 절더라도 싫어하지 않나니

 내 속에서 태어난 자식이기에 종일토록 아끼시고 귀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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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탁부정은

일곱째는 더러운 것을 씻어주신 은혜이니

지난날 예뻤던 몸내 퍽이나 풍만했으니

눈썹은 버들 잎 같고 두 뺨은 연꽃보다 붉었는데,

깊은 애정으로 얼굴엔 주름살 늘고 잦은 빨래로 손거울 녹슬건만

오로지 아들딸 사랑하는 정성으로 어머니는 비로소 매무새를 추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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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원행억념은

여덟째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 걱정하신 은혜이니

죽어서 이별함도 잊을 길 없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더욱 슬픈 일이니

자식이 집을 떠나 타관에 있으면 어머니의 마음도 타향에 가 있다.

낮이나 밤이나 마음에 되씹으며 흘리는 눈물은 천 줄긴가 만 줄긴가.

원숭이가 새끼 찾아 슬피 울듯이 자식 생각 구비구비 애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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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조악업은

아홉째는 자식들을 위하여 궂은 일을 하신 은혜이니

부모의 은혜는 강산보다 중하니 깊으신 그 은혜 보답키 어려워라.

아들의 괴로움을 대신 받기 원하고 아들이 괴로우면 부모 마음 편치 않네.

멀리 집 떠난단 말 들으면 집 나간 밤부터 단잠을 설치나니

자식들의 수고는 대수롭지 않아도 어머니의 마음은 오래도록 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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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경연민은

열째는 끝까지 사랑하신 은혜이니

부모의 은혜는 깊고도 무거울사 예뻐해 주는 정 잠시도 끊임없네.

앉았거나 섰거나 마음에서 안 떠나고 가깝거나 멀거나 생각 항상 따라가네.

부모 연세 백 살이 넘어도 여든 살의 자식을 걱정하나니

간절한 그 애정 언제나 끝날꼬. 두 눈을 감아야 비로소 다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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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왕생 발원도

 

 

 

 

 

대웅보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내용

 

1.육바라밀(六波羅密)

대승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수행덕목으로 생사의 세계를 넘어서서

열반에 이르게 하는 6가지의 바라밀을 말한다.

보시(布施),지게(持戒),인욕(忍慾)

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보시태자(布施太子)

중앙은 석가모니불이고 왼쪽은 석가모니불성도시 공약을 올린 수타자이며

오른쪽은 과거불중 맘가라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시 바라밀을 성취 할 때

자식을 보시하는 장면이다.

 

2.지게(持戒)

재가와 출가,대승과소승의 모든 계(戒)와 율(律)을 잘 지켜 악업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여석부낭

가죽주머니를 타고 있는 다섯비구니에게 나찰이 나타나서

그 포낭을 달라고 하였으나 줄  수 없다고 하자 그러면 그 반쪽

이라도 달라고 하자 다시 거절하였는데, 다시 그 1/4만이라도

요구를 하였으나 끝내 거절을 하였다.

 

3.인욕(忍慾)

타인으로 부터 받은 모든 박해와 고통을 잘 참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여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고 제법(諸法)을 밝게

관찰하여 마음이 안주(安住)하는 것을 말한다.

인욕선인

옛날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실 때 많은 선녀들이 부처님이 공경하고

따르므로 이를 시기한 가리왕이 부처님을 칼로 사지를 자르고

온 몸을 난도질 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4.정진(精進)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과 바라밀을 힘써 실천하여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교족정진(喬足靜進)

높은 벼랑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버티면서 정진하는 것으로 아난존자는

혼자 비야리성의 외딴 수행도량에 찾아가 칠일칠야 합장 교족 정진법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정진을 할 때 에는 대분심과 대용맹심과 대의심을

내어야 한다. 정진은 자아를 깨치는 힘과 임무에 충실한 힘이 되어

바닷물을 품어 내고 보배구슬을 찾듯이 힘을 내어야 한다.  

 

5.선정(禪定)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멈추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는 수행이다.

구년면벽(九年面壁)

달마조사께서 구년면벽으로 마음을 깨쳐 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마음이 편안 할 때 안정이 되는 것이고,이 에 내 마음을 분명하게

깨쳐야만 진정한 안정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언재 어디서나

어떤 순간에도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영원한 생명력이

존재하는 것이 안심입력이라 할 수 있다.

 

6.지혜(智慧)

一切法의 自性이 空함을 깨달아 眞如實相을 바로 보는 지혜의 완성을 말한다.

골수오도(骨水悟道)

원효스님께서 의상대사와 같이 당나라에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가시다가

해가 저물고 비가와서 토굴을 찾아 하루밤을 지내는데 자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으니

마침 그릇에 물이 담겨져 있어 시원하게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 바가지에 담긴 빗물이었음을 아는 순간,

구역질이 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깨달고

가던 길을 돌려서 서라벌(경주)로 돌아와 불교대중화운동을 전개하고

 240권에 달하는 저서를 펴내게되었다,

 

※ 이 글을 송광사 대웅보전 외벽에 있는 벽화에 쓰여진 것을 옮긴 것입니다.

 

 

 

 

대웅보전의 문살

 

 

 

이하 대웅보전 주변 풍경들

 

 

 

대웅보전 뒷편 담장들 모습

 

 

대웅보전 뒷편 佛日門으로 가는 계단

 

 

지장전 뒷편에서 대웅보전으로 본 풍경

 

 

佛日門 올라 가는 계단. 일반인 출입금지구역

 

 

 

 

 

승보전 옆에 있는

비사리구시

 

 

송광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절에 남아 있는 '비사리구시'를 보면 알 수 있다.

4,000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1,724년 전라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만든 것이라 한다.

송광사에 있는 <능견난사>, <쌍향수>와 함께 3가지 명물이라 일컫는다.

 

아쉽게도 필자는 그 모습을 놓치고 온터라 인용사진으로 대신해본다.

 

      △ 송광사 쌍향수  [ⓒ문화재청]

 

송광사 곱향나무 쌍향수는 나이가 약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송광사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전한다.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이며,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현재는 천연기념물(제88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천자암 뒤뜰에 위치)

 

      △ 송광사 능견난사 - 음식을 담는 그릇  [ⓒ승보박물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능견난사>

송광사에서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그릇이다.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를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그 만든 기법이 특이하여 위로 포개어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딱 들어맞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어 낼수가 없었다고 한다.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뜻에서 <능견난사>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송광사에 29점만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관음전 앞에서

 

 

 

 

 

나오면서 다시 한번더...

 임경당,삼청교(능허교),홍예,우화각,그리고 봄이 오는 소리가

 물빛에 아름답게 수 놓고 있었다.

 

낙하담에 걸린 이른 등들...

 

 

 

법정스님을 기리면서...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소유사처럼 느껴진다.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 法頂 큰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 

 

 

 

 

後記

 

※ 송광사는 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번 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무슨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케 답사를 못 하였다.

이번에도 외,이종간에 어르신을 모시고 갔으나 나 혼자 취재한답시고

돌아 다녀 못내 미안함이 가득하고 그나마 제약된 시간에 취재 한 것이 이게 다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일행들에서 빠져서 송광사 전체를 속속들이 취재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는 없고 하여 나름대로 바쁘게 쫒아 다니면서 취재하였으나

송광사 1/10도 못 본 것 같아 많이 아쉽다.

추후에 시간이 주워 지면  조계산과 송광사 언저리를 취재하고 싶고,

다시 선암사를 넘어 가는 길을 가고 싶다.

가능한 이면 늦가을 이나 겨울의 송광사를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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