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신라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넋이 서린 '法廣寺址'

安永岩 2011. 12. 24. 00:06

 

신광 비학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 폐사지,法廣寺址

 

 

 

법광사지는 포항시 북구 신광면 비학산 아래 있다.

비학산(飛鶴山)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 정상 동편 중턱에 작은 산 모양의 불룩한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을 등잔혈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묘를 쓰고 가까이 있으면 망하고 멀리 떠나야 잘 된다는 전설과

비학산에 묘를 쓰면 가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름철에 한발이 극심할 때면 주민이 뜻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거나

인근 주민들이 묘를 파헤치기도 하여 종종 송사가 있기도 한다.

지금은 법광사에서 비학산 정상까지 우거진 수목과 아름다운 경관,

 맑은 물의 정취에 매혹되어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법광사지에는 1952년에 건립한 아담한 법광사가 있다.

 

 

 

현 법광사 가는 길이 짧지만 운치가 있다.

 

 

법광사 法廣寺

 

법광사(法廣寺) 신라 26대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왕명을 받고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이름을 법광사라고 한 것은 신라 불교를 중흥시킨 법흥왕의 법자를 따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라고 한다. 진평왕은 여러 번 법광사 대웅전에 와서

직접 불공을 올렸으며, 대웅전에 걸었던 법광사라는 현판도 진평왕의 글씨였다고 전한다.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 釋迦佛舍利塔重修碑)」가 전하는데 비문에 의하면

 

신라 24대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무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를 보내오자,

진흥왕이 궁으로 맞아 들였다.

그 뒤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원효에게 명하여 법광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또 비문에 보면, 비문을 작성하던 당시(1750, 영조 26)에만 해도

 2층의 대웅전,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으나

1863년 방화로 불 타버렸다.

현재의 법광사는 1952년에 옛 법광사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

옛 절터는 경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유물로는

 석가 불사리탑인 삼층석탑과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있다.

 

 

법광사는 한때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골의 호젓한 절집이다.
법광사의 주전각은 원통전이다.

높은 석축 위에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산령각이 있으며

마당엔 근래에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원통전 좌우로 요사와 종무소가 있다.

원통전 (圓通殿)

원통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되어있다.

안에는 지장보살존상, 관음보살, 석가여래 존상, 아미타존상, 석조 보살존상, 후불탱,

 좌우부처로는 문수보살, 약사여래탱, 신중탱이 있다.

<원통전의 주련글씨>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는 들은바 없이 듣노라.

甁上錄楊三際夏  꽃병 위 푸른 버들 삼제의 여름이요

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앞 푸른 대나무 시방세계 봄이로다.

 

 

요사채 너머로 비학산이 보이고

법광사 주변에 단풍이 아름답다.

 

 

 

원통전에서 본 절 마당 풍경

 

 

산신각

 

진영각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원통전을 돌아 가는 모퉁이에

아무렇게 쌓은 석축이 오랜 세월을 말해 주는 듯 정겁다.

 

법광사지 가는길

 

나즈막한 돌담과 단풍이 자연스러움으로 아름답다.

그저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 쌓은 돌담이 얼마나 정겨운지?

더구나 높이까지 낳게 쌓아 눈이 즐겁고 돌담에 자연스럽게

덩굴이 올라 가는 모습과 떨어진 낙엽이 참으로 평화롭게 다가온다.

나는 이 길을 왔다가 갔다가 여러번 반복하면서 돌담 너머로 절도 보고

계곡쪽도 기웃거려 보고 돌담도 만져 보고 주변에 풀도 살펴보고...  

 

 

법광사지 삼층석탑 올라 가는 계단

현 법광사를 돌아 가면 바로 뒤에 있다.

 

 

올라 가면서 뒤 돌아 본 현 법광사

 

법광사지는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탁트인 신광벌이 한눈에 보인다.

 

삼층석탑과 최근에 세운 사리탑비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삼층석탑

 

法廣寺址

 

사적 제493호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619-1번지 일원

 

이 곳은 飛鶴山 법광사터이다.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왕명에 의해

처음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후 興德王 3년(828)에 향조(香照)와 원적(元寂)이

재산을 희사하여 석가모니불 사리탑을 세우고 사리 22과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 英祖 22년(1746)에 5층 석탑을 고치는 과정에서 22과의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동함(銅函)을 만들어 탑 2층에 봉안하였다.

 

고종 24년(1887)에 3층만 남아 있던 석탑을 고치는 과정에서

1750년에 건립한 「사리탑중수기,舍利塔重修記」가 발견되었다.

그 뒤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 유물로는 석탑과 연화석불좌대,쌍귀부등이 있다.

1968년 탑속에서 탑지석(塔誌石) 2개가 발견되어 법광사의 내력을 밝혀 주고 있다.

탑지석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내용>

 

석가불사리탑 (釋迦佛舍利塔)

이 석탑은 현재 사찰 중심부에서 서남쪽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탑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옆에는 1750(영조 26)에 세운 비석이 있다. 

옆에 있는 비문에 의해 828(흥덕왕 3)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968년에 도굴되어 내부에 봉안된 사리장엄이 도난 되었다가 곧 회수되었다.

 사리장엄의 하나로 발견된 탑지석의 내용에 의하면 828(흥덕왕 3) 탑을 세우고

846(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지원이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420㎝이다.

 

 

 1750년에 세운 사리탑비,삼층석탑 뒤에 있다.

 

 

 

 

옛 절터는 모두 밭으로 변해버렸고 잡풀만이 무성하다.

 

 석가불사리탑인 삼층석탑이 홀로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밭 사이에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남아 있고

밭 중간 중간에 건물의 주춧돌이 보인다.

 

연화석불좌대와 장대석

 

 

연화석불좌대와 그 너머 좌측에  삼층석탑이 조그만하게 보인다.

이 좌대에 놓였던 거대한 석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좌대 사방으로 놓여 있는 장대석을 보니 이 석불을 모신

법당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터를 보니 규모도 어마어마 하지만

남쪽으로 보이는 넓은 신광벌이 한눈에 들어 온다.

아마 부처님의 눈길이 이 신광벌로 향한 듯 했다. 

 

 

연화석불좌대 너머로 비학산이 보이고...

 


 

 

 

 

 

 

 

 

 

 

 

 

 

 

 

 

 

 

 

 

 

 

 

연화석불좌대만이 그 옛날 법광사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어려운 애기이지만 이 터에 법광사를 복원한다고 하면

멋진법광사가 될 것이다.

앞은 끝 간데 없이 일망무제로 트여 시원함을 선사하고

뒤에는 병풍처럼 둘러 처진 비학산이있고

 거기에서 흘러 내린 계곡물은 심신을 적셔주고...

무엇보다 정남향의 위치가 좋아

따스한 햇살을 온 종일 받는 길지이다.

 

아마 진평왕이 다시 살아 온다면 가능할 것이다.

 

 

525칸의 거대한 사찰였다고 하는데

주변의 넓은 터를 보고 大刹였음을 짐작케 한다.

 

 

 곳곳에 놓여 있는 주초석이 세월을 웅변허고 있다.

 

 

 

 

숭안전崇安殿

崇安殿은 절터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켜선 뒤쪽에 있다.

신라 제26진평왕(579~632 재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진평왕의 넋이 항상 이 법광사지에 머물러 있는 현장이다.

 

그 옆에 조그만하게 철 울타리 속에 있는 것이 쌍귀부이다.

 


쌍두귀부

쌍귀부 는 절터 뒤쪽 언덕 위 밭 가운데 있다.

두 마리 거북이 옆구리를 붙이고 나란히 엎드려 있다.

비신과 비머리는 없어졌다.

 귀부도 머리를 포함하여 몸 전체가 많이 깨졌다.

등에 새긴 거북 무늬도 희미하다.

 비신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폭은 대략 86cm두께는 19cm쯤 된다. 


진평왕의 원찰인 법광사의 쌍귀부는 훼손상태가 가장 심하다.

머리를 포함한 몸 전체가 많이 깨어졌다. 아마 오랜 세월동안 무방비로 방치해 놓은 결과가 아닐까?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나타난 쌍귀부라는 중요성 때문에 훼손 되었지만 잘 보관 할 희소성 가치는 분명히 있다.

 

금당지 서쪽에 위치한 구릉에 동쪽으로 놓여 있다.귀부는 쌍귀부좌대로 귀부는 창건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생각되어 진다.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아버지로 화랑세기 기록으로 미실이란 여인의 세력때문에 더욱 법력의 기운을 얻고자 불사에 힘을 기울인다.     
쌍귀부의 발가락 표현에서 느끼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조각 솜씨를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록 깨져 그 형체를 알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하던 두 마리의 거북이가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확인 할 수 있다. 이곳 법광사는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법광사의 주요 위상을 쌍귀부를 통해서도 익히 알리고 있다.

 

비학산계곡

법광사지 뒷편에 비학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물이

 암반 위로 쏟아져 내려 오면 장관인데

이 날은 수량이 없어 암반 위에서 시간을 즐기다.

 

법광사 뒷편에 있는 감나무 한그루

 

곱게 물들어 내리는 감잎 위로 떨어진 연시를 어린 날을 생각하며

주워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다. 또한 사리탑 가는 길에는

노랗게 익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길을 끈다.

 

법광사 담장을 따라 사리탑 가는 길은

어릴 적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정겹다.

굽이 돌아 있는 담장을 따라 비학산의 아름다운 줄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시리도록 맑다.

십여년전만 해도 법광사옆에 물놀이장이

있어 어린이 뿐 아니고 어른들까지 물놀이를 즐겼고

특히 비학산 등산후 이 계곡에서 풍덩~ 즐긴

물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정겨운 법광사 담장길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편안하고 고요한 우리네 호젖한 한 시골 담장 같지 않은가?

그저 만저 보고 싶지 않은가? 올라 타 보고 싶지 않은가?

나는 어릴 때 처럼 담장을 손으로 쭉~그으면서 걸어 갔다.

 

< 201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