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旅行이야기

[진주여행]진주성/촉석루/의암

安永岩 2018. 10. 18. 14:47

 

공북문(拱北門) 진주성 후문

 

진주성의 정문은 촉석문인데 관람은 옆에 후문격인 공북문으로 들어 갑니다.

공북문은 정문보다도 크고 웅장하며 접근성이 좋다.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소재해 있습니다.

차례로 돌아 보겠습니다.

 

 

진주성內 유등축제현장

 

공묵문을 들어 서면 우측에 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장군의 동상이 있고

좌측으로 임진대첩계사순의단과 촉석루가 있는데 먼저 좌측으로 해서 참배하고 촉석루로 갑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1592년 진주대첩의 승전과 1593년 전몰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진주성 1,2차 전투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성내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1천여 명의 의병으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도 하고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중에서도 이순신 한산도 대첩, 권율 행주산성대첩과 함께 3대 첩승의 하나로

꼽힌다. 일명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고도 한다.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일본군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진공하였다. 이때 인근에 있던 박진 등의 군사가 지원했지만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함께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은 살해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부자, 고종후 등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도 일거에 학살하였다.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촉석루

 

진주남강유등축제기념행사장

 

 

촉석문

진주성 정문

 

촉석루 입구

 

 

 

촉석루(矗石樓)는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라고도 한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8호로 지정되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진왜란 중에서는 상시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서예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복원하였다.앞면 5칸 옆면 4칸이다.촉석루의 뒷쪽으로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아래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촉석루 내부 모습

 

 

 

 

 

 

진주성 촉석루에서 바라 보는 남강의 풍경이 시원스럽게 다가 옵니다.

얼마전에 방문했던 밀양 영남루에서 밀양강을 바라 보는 풍경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촉석루에서 바라 보는 진주 남강의 느낌은 사뭇 사릅니다.

풍경은 시원하지만 강물을 바라 보고 있자니 426년 전에 왜놈들에게 무참히 죽어 갔었던 數萬의 우리 선조들의 울부짖음이 어제일같이 들려 옵니다.

세월도 야속타~푸른 남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흘러 가고 물 위에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수많은 유등만이 떠있네~

 

 

 

 

 

 

 

의기사(義妓祠)

 

촉석루 바로 옆에 의기사(義妓祠)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잠시 참배합니다.

 

 

 

 

사당 뒤뜰에 자라고 있는 오래 된 배롱나무 한그루가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듯 당당히 수호신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의기사에서 본 촉석루 전경

 

 

 

촉석루에서 의암내려가는길

 

 

좌부터 의암사적비,의암과 논개유등상

 

 

 

 

의암(義巖)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최경회(임종시를 남기고 남강에 투신 자결)의 첩 논개는 그해 7월 7일(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7월 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이후 논개가 투신한 자리는 의암이라고 불렀다.

 

 

의암사적비


 

촉석루 성벽

 

 

 

 

 

촉석루와 의암을 나와 진주성내로 갑니다.

어느듯 해가 늬엇늬엇 서산으로 넘어 가고 있다.

 

 

진주성내에는 '남강유등축제'에 맞추어 수백개의 갖가지 모양의 燈이 설치되어 있다.

그것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어떻게 이 많은 등을 만들수가 있었을까? 신기하다.

관계자여러분들의 노고가 물씬 느껴지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왜,진주남강유등축제가 유명한지를 알 것 같다.

특히 남강에 띄워진 유등은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더구나 하나 같이 실물과 같이 정교하게 표현하여 하나의 예술품이다.

2012년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할 곳의 1순위이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조선시대관찰사 감영의 정문이다. 경상남도문화대자료 제3호로 지정.조선조에는망미루라고 불렀고, 

처음 창건은 광해군10년 병사 남이홍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으로 건립하였고, 

그 후로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되었다.오른쪽으로는 수령이하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새겨져 있고, 

왼쪽 편으로는 문충공 하륜 선생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다. 

이 문을 바로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살신성인으로 물리친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가 나타난다.

 

 

경절사

영남포정사 왼쪽 옆에 '대왕세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하륜이 태어난 곳이라는 작은 비석이 보이는데, 맞은 편 대각선으로는 진양하씨의 시조이자

고려 시대 충절의 상징이었던 하공진 공을 모신 경절사가 있다.

경절사는 고려시대 1010년 강조의 변을 대의명분으로 침입해온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협상단을 자처해 스스로 볼모가 됨으로써

연경에서 죽어간 충절의 화신 하공진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자, 하공진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거란의 제2차 침입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당사자이지만, 제1차 침입 때 알려진 서희와 제3차 거란의 침입 때 귀주대첩을 통해 알려진 강감찬 장군에 비해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바로 왼쪽 편으로는 청계서원이 있다.

<위키백과>

 

 

비석군

 

북장대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소실된 것을 1618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내와 성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락집형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인사동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봉산이 보이며, 오른 편으로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삼강오륜를 표현한 燈

 

청계서원

 

경절사

 

 

포루가는길 성곽

 

 

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서장대 가는 길

 

 

서문

바로 앞에는 호국사가 있습니다.

 

호국사(護國寺)

 

 

호국사

전통 사찰 제70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호국사와 창열사는 바로 붙어 있는 건물이며, 윗쪽으로 서장대가 있다.

 

 

 

 

서장대 오르는길

 

 

서장대

 

진주성 서문의 목조팔작 기와건물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에는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외침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위한 지휘장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서장대, 북쪽의 북장대, 남쪽의 남장대로는

촉석루가 있다. 남강을 따라 절벽 위에 쌓은 진주성의 서쪽 벼랑 끝에 지어져 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명명되어 있고,

규모는 작지만,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현재의 건물은 소실된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판은 1979년 은초 정명수가 다시 글씨를 다시 썼다. 정면으로 3칸, 측면 2칸의 팔자형 팔작 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서장대에서 바라 본 음악분수대,천수교

 

 

서장대 석양

 

 

서장대 대북 장군 군사 병사 깃발

 

 

 

 

 

 

 

 

진주성내에는 '춘하추동 풍요로운진주성유등'이란 제목으로

유물,민화,속담,소원성취나무체험 등등 수많은 燈이 차례로 불이 들어 오는데

우선 엄청난 숫자에 놀랍니다.

 

 

 

 

 

 

어느새 어둠이 진주성에 내려 앉았습니다.

어둠과 함께 차례로 불이 들어 오기 시작한 진주성내 갖가지 燈들...

화려하게 진주성을 밝힙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네요

 

국립진주박물관 앞 마당에 세워진 유물등들

 

 

진주성내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즐비합니다.

 

 

진주성내 야경

제법 쌀쌀한 밤기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은 관람객들이 들어 왔네요

내일(10/1)부터 14일간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진행됩니다.

 

수많은 유등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연날리기 燈

 

 

공북문 야경

 

이제 진주성을 나와 숙소를 갑니다.

내일 진주의 진산 월아산을 산행하고 진주관광을 좀 더 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10월에

아름다운 여행과 함께 멋진 추억들을 만들어 보세요

행복하세요

즐겁게사십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