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영천 횡계구곡의 3곡'모고헌'

安永岩 2011. 8. 19. 01:07

 

영천 보현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 온 횡계계곡,

그곳에 두 형제분의 우애가 깃든 '모고헌'과 '옥간정'의 가슴 찡한 이야기

 

영천에서 화북면자천리를 지나서 보현산 천문대 방향으로 1km여를 가다가 횡계리에 이르면

길 오른쪽으로  먼저 모고헌(慕古軒)이 보이고 이어서 옥간정(玉磵亭) 건물이 보인다.

 

 

모고헌(慕古軒)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57-3

 

이 건물은 횡계서당(橫溪書堂) 내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조선 숙종떼의 성리학자인

지수 정규양(정규양,1667~1732)이 동왕 27년(1701)에 대전동에서 이 곳으로 이사하면서

지은 건물로 태고와(太古窩)라 하였다. 그러나 영조 6년(1730)에 문인들이 현재의 건물로

개축하면서 모고헌이라고 하였다. 이를 지은 정규양과 그의 형인 정만양은 이 곳에서

옥간정을 왕래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뜻으로

훈(정만양의 호가'훈수')과 지(정규양의 호가'지수')로

호를 삼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횡계서당(橫溪書黨)

원래는 횡계서원였으나 조선 후기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후에 '횡계서당'으로 복원하였으며 '모고헌'은 횡계서당내에 있는 정자로 유명하다.

 

 

 

 

 

 

횡계서당과 모호헌은 건물이 모두 3동으로 몹씨 초라하지만 이웃한 옥간정과 함께

역사성이 깊고 특히 벼슬과 권력을 마다 하고 오직 학문 연구과 후학양성에 목적을 둔

양수(훈수,지수) 형제의 우애가 돈둑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는데...가짓것

우람한 건물이 무슨 소용이람? 결코 컽이 속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예나지금이나...

하여 비록 초라한 건물이지만 그 시대를 살다간 양수 형제의 선비정신은

지금도 우리가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전국적으로 일고 있는 각종 문화재와

서원들의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과연 합당한 일일까? 되 묻고 싶다.

 지척에 '임고서원'도 성역화사업이 한창인데 과연 그것이 합당한 일일까?

오래된 역사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최소한의 편의시설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모고헌 뒷편에 자라고 있는 300년 된 은행나무

모고헌과 역사를 같이 하고 있는 은행나무이다.

 

 

 

 

양수(兩叟)선생은 바로  훈수(塤叟;鄭萬陽;1664~1730), 지수(篪叟;鄭葵陽;1667~1732) 두분 형제분을 말하는데,

 

정만양,정규양 두분 형제의 호가 각각 훈수와 지수이다. 이분들의 호에 들어간 훈(塤)과 지(篪)는

 

악기의 이름으로 훈은 흙으로 만든 피리이고 지는 대나무로 만든 길다란 퉁소를 가리키는데,

 

『시경(詩經)』··「小雅」편 何人斯에 나오는 “伯氏吹塤 仲氏吹篪”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훈지아주(壎篪雅奏)’는 형제가 서로 화목함을 비유할 때 쓰인다.

 

 이 두 형제분은 그 호(號)의 뜻에 걸맞게 평생을 함께 지내며 우애를 유지한

 

영천지역의 조선후기 대표적인 영남남인이다.

 

鄭萬陽ㆍ葵陽  형제는 본관은 영일(延日)로 아버지 생원(生員) 정석주(鄭碩冑)와

어머니 김방열(金邦烈)의 따님 의성김씨 사이에서세거하던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塤叟정만양은 현종5(1664)년에 태어나 영조6(1730)년에 67세로 졸하셨고

지수(篪叟)정규양은 3년뒤인 현종8(1667)년에 태어나 영조8(1732)년에 66세로 졸하여서

두 형제분이 거의 비슷하게 생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분의 선대는 일찍이 고려조부터 우리 영천을 근거지로 삼았다.

두분의 6대조는 정윤량(鄭允良)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인물이고,

특히 5대조는 정세아(鄭世雅)장군으로임진왜란때 이 지역 의병을 이끌고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이분들 가문의 이름을 경상도 일원에 널리 떨치게 된 것도 이분들의 5대조를 전후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후 증조 정호인(鄭好仁)은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양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후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지낸 가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종조부인 학암(鶴岩) 시연(時衍)역시 학문으로 인근에 이름이 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정씨들의 성세는이들 塤篪 형제대에도 유지되었는데,

영조 4년 이인좌ㆍ정희량의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을때

정규양이 영천지역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으로 추대된 데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훈수 정만양선생의 묘소는 처음 공덕산(孔德山)둔덕에 모셨으나

 1744년에 북안면 원당리(元堂里)의 선영아래에 개장(改葬)하여 모셔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수 정규양 선생의 묘소는 영천시 화북면 죽전리 용골산(龍骨山)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이 양수선생 형제는 횡계정사(橫溪精舍)에서 제향하고 있다.

 

 

 

모고헌 앞 횡계계곡

영천에 명산,천문대가 있는 보현산(1124m)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이다.

 

 

모고헌 정자

이 정자는 정 남향이며, 뒷쪽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사면에 퇴간(退間)을 둘린 정방형 평면을 하고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앞쪽에서 보면,완전한 중추누각이나,뒤쪽에서 보면 단층건물로 보이는 형태이다.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평면구성에서 독특함을 엿볼 수 있다.

 

 

두 형제분이 모고헌과 옥간정을 서로 왕래하면서 우애를 다지고

벼슬과 권력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연구에 몰두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참 선비였다. 

 

정자 앞 횡계계곡

한 여인이 다슬기를 잡고 있다.물이 맑다는 증거가 아닌가?

 

 

<2011,8,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