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얼이 서린 영천'임고서원'

安永岩 2011. 8. 29. 23:57

 

고려말 충신,포은 정몽주의 얼이 서린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하였다.

<문화재청>

 

 

 

임고서원의 은행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

이 나무는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5.95m에 이르는

나이가 약 500년의 은행나무로서 생육상태가 비교저 양호한 노거수이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약 22 m,남북방향으로 약 21m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 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며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임고서원 입구.은행나무는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영천에 자랑,충절의 고장,임고면! 꼭 한번 들리고 싶었던 곳이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고향이 영천이라는 사실을 얼마전에야 알았고

그러다 보니 더욱 빨리 가보고 싶었다.물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 가보는 것이 좋지만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8월 14일 오전에 제일 먼저 포은 정몽주선생의 얼이

서려 있는 '임고서원'을 들렸다.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임고서원 주변 성역화 사업으로 몹시 어수선했다.

이 더운 8월 뙤약볕에 땀 흘리며 일하시는 분들께

둘러 보는 제가 죄송해서 최대한 간섭을 주지 않을려고

일 하시는 분들이 쉬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둘러봤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현 임고면 우항동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전법.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가되어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아무런 현판이 없다.

새로 복원한 서원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서원 정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돌아 서는데...혹시 싶어 좌측 담장을 끼고 돌아 가니

이런 쪽문이 있어 조용히, 참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갔다.그리고 아무런 꾸밈도 없고

단순한 건물과 담장,그리고 사당 오르는 계단, 그 끝에 보수중인 사당,

마치 충절을 나타내 듯 붉게 핀 백일홍나무가 전부인

서원 내부를 돌아 보았다.

 이곳은 그 흔한 현판 하나 없었다. 입구에 걸린 '안내문'이

전부였다.바로 옆에 새로 복원한 여러채 웅장한 건물에

모든 현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그 곳에 다시 성역화사업이

지금 한창 진행중에 있다.

 

 

 

옆에 복원한 웅장한 서원에 비해 마치 버려진듯 초라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나는 여기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뭐랄까? 지난 역사를 함께 호흡하며

포은선생의 충절을 기리며 옛 향기를 최대한 맡고 싶었다.

나는 근래에 새로 복원한 웅장하고 화려한 옛 문화재보다

다소 초라하고 허수선한 옛 건물이지만 그것에 더욱 情이

많이 갔다. 그것은 나 뿐 아니라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같은 뜻일 것이다.

 

 

 

먼지가 뽀얗다.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하다.

매일 청소를 하도록 한사람 정도는 고정 배치했으면 좋겠다.

 

 

 

 

고려 三隱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목은 이색)의 한 사람으로

기울러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1401)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에 추봉(追封)되었다.

 

 

 

사당오르는 길

 

 

 

 

 

사당은 공사중

 

 

 

사당 오르면서 뒤돌아 본 은행나무와 임고면 일대

 

 

 

앞에서 언급한 복원한 임고서원 전경

 임고서원 옆에 있다.보통 관광객들은 복원한 서원을 둘러 보고 간다.

그 옆에 있는 옛 서원은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옛 서원은

아무런 현판과 소개 안내문이 없기 때문에 다소 삭막한 느낌이기

때문에 공개를 꺼리는 듯 보였다.

 

 

 

서원앞 은행나무가 하늘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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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옆 과 꿀뚝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아들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장차 대성시키기를 결심한 나머지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간곡히 훈계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올세라 /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러 일까 하노라”

 

이 시에는 이씨부인의 고절한 인품과 자식교육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선생은 '백로가'의 훈계를 늘 가슴에 새겨 대의를 지켜 물욕에 초연했다.

 

1355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산소 곁에 움막을 짓고 기거를 하면서

살아계실 때 못다 한 효도를 하면서 3년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당시만 해도 부모상에 대한 예법이 미비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백일상을 지냈으나 1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 사람들이

행하지 않는 3년상을 여묘살이로 마치면서 효에 모범을 보였다.

 

 

서원 옆 배롱나무, 그너머 은행나무

 

포은 선생은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祖로 추앙되었고

詩文,書畵에도 뛰어났다.

 

 

바깥에서 본 서원 담장과 정낭

 

 

 

담장과 경내 백일홍

 

 

 

↘임고서원은 지금 성역화사업이 한창입니다.

 

임고서원 전경

좌측에 500년된 은행나무,그 뒤 옛 임고서원, 우측에 복원한 임고서원.

다시 2011년에 입구 영화루 와 임고서원 복원중이고,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우측에 엄청난 크기의 건물을 여러채 짓고 있다.아무래도 사찰 템플스테이

처럼 서원템플스테이를 운영하기 위해 짓는 듯 했다. 그 규모가 面 단위 문화재

로서 엄청난 규모였다. 하기사, 포은 정몽주선생를 기리는 서원이 아닌가?

 

 

 

경내에는 묘우 표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신도비,

유물보호각 삼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등이 들어서 있다. 

 


 

새로 단장 하느라 경내가 어수선하다.

 

 

 

임고서원 현판

당대 명필 윤봉오군수의 글씨이다.

 

 

서원내에 걸린 각종 현판들.단심가도 있다.

 

 

 

 

 

 

 

 

그 유명한 '단심가'

초등학교 때 참으로 많이도 읽고 쓰고 하였다.

 

 

그 중 重建記가 많았다.

 

 

 

 

 

 

 

늦가을에 임고서원의 모습 - 현지 홍보안내표지판

 

 

서원옆 기암괴석 위에 정자를 짓고 있다.

 

<201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