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 경주 노동리 고분군 - 봉황대(鳳凰臺)

安永岩 2011. 11. 19. 00:43

 

경주는 찬란했던 신라 천년의 古都답게 문화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유독 山(?) 만한 古墳들이 많다. 신라 왕릉을 위시하여 오릉,대릉원,서악리고분들은

 시내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으나 이 路東里古墳群은 시내 중심가 번화가에 있다.

대릉원에서 조금 떨어진 봉황로 대로변 양 옆으로 고분이 있는데

 동쪽에 위치한 고분군을 路東里고분群라 하고,

서쪽에 위치한 고분群을 路西里고분群이라고 부른다.

*

오늘은 남산을 산행하고 시간이 있어 모처럼 봉황대를 찾았다.

얼마전 1박2일에서 야간에 봉황대를 찾아오라는 미션이 있었는데

멤버들이 봉황대 자체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웃습기도 하고

역사를 너무 모른다 싶기도 하고...하기사 무덤을 찾아 오라고 하면

쉽는데 생소하게 봉황대라고 하니 이게 무덤인지 무슨전망대인지

문화재인지...헤메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나중에는 금관이 출토된 곳

이라고 하니 알아 차리고 죄다 찾아온다.유홍준교수님은 이 봉황대의

역사성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맞게 달 밤에 능의 곡선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다.유교수님의 책(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전 5권) 곳곳에서

문화재의 보는 시각,장소,주변 산물과 어울러

보는 아름다움을 주로 강조하셨다. 

 

봉황로를 좌,우로 하여 우측에 노동리 고분군 즉 봉황대이다.

 

고분군이 끝나는 부근에 이런 번화가 봉황로이다.

입구 홍살문은 현대식으로 복원하였지만 그 옛날에도 있었단다.

이런 시내중심가 번화가에 산 만한 무덤이 있으니...무서운 생각이

들만 하지만 직접 보면 그러한 생각이 사라진다.

무덤에서 자라는 큰 나무들로 인해 꼭 무슨

동산 공원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드디어 '봉황대'이다.

이 봉황대를 한바퀴 돌아 보면 무덤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50~60년 전에는 아래 옛 사진에서 보듯이 사람들이

옹기종기 보여 살았다.그리고 이 언덕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야산으로 알고 살아 왔으니 말이다.하기사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으니...무덤으로 생각했겠나?

 

우리 상식으로는 무덤에 특히 왕실 무덤에

나무가 자란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으리라...

 

1950년대 봉황대사진이다.

봉황대 주변에 기와집,판자집들이 올망졸망모여 부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한 봉황대는 그냥 일반 야산으로 생각하고

올라 가서 놀기도 하고 여름에는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흔적이 사진에서 처럼 오솔길이 뚜렷이 나있다.

 

경주 노동리 고분군(慶州 路東里 古墳群)

사적 제38호

소재지 : 경주시 노동동 261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다.

남아 있는 무덤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봉황대라고 부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문이다.

일반 무덤에도 그 흔한 나무뿌리가 자라도 뽑고,제초제를 뿌리고 난리인데

하물며 왕실의 무덤에 이런 큰 나무들이 자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기사 처음에는 관리를 잘 해오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오면서 자연 방치가 되었고

바람에 날아 온 나무 씨앗이 여기 저기 떨어져 자라다 보니 자연히 언덕으로 

착각하고 놀았고 그리고 몇 백년이 흐르니 자연 고목으로 자라 베어 내지도 못하고

그냥 방치하다 보니 이러한 왕릉이 된 것일 것이다.

*

이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 더 운치가 있고, 역사성이 있는 

귀한 자산이 된 것이다.시민들에게 더욱 더 친근감을 주고...

  

북쪽에서 본 봉황대

 

수백년 된 듯한 노거수(느티나무)가 곱게 물들었다.

옛 사진에서 본 것 처럼 노거수 사이로 오솔길이 지금도 나 있다.

이 릉을  둘러 가면 멀고 이 봉황대를 올라 내려 가면 지름길이니까

어린애들이 많이 올라 다닌다고 했다.실제로 이 봉황대는 애들 놀이터이다.

그리고 밤에는 연인들의 테이트 장소이고...  

 

 

봉황대에 노거수가 너무나 아름답다.

위엄도 있고...

느티나무의 밑둥이 얼마나 크고 위엄이 있는지...

볼 수록 신비롭다.경주에서 유일한 릉에 노거수이다.

봉황로 도로에서 본 봉황대

 

봉황대라는 이름에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이 고분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었다고 한다.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조사한 금령총(金鈴塚)터와 식리총(飾履塚)터가 있는데

 좌측이 식리총(126호고분),가운데 야트막한 터가 금령총(127호고분)

그리고 우측이 현재 미발굴 봉황대이다.

*

웃기는 애기는 일제 강점기에 경주역 기관차고를

매립할 흙이 모자라자 이 릉의 흙을 채취하고자

무덤을 파헤졌다고 하니...

그런 생각을 한 그 놈들이 저지른 행패가 어디 한 둘인가?

 

 

1924년에 발굴 때 금령총에서 금관,금령(금방울), 그리고 유명한 기마인물형토기가

발견되었고 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왕자의 것으로 추정,

금령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은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는데 금관,은관은 나오지 않았으나 거북모양의

테두리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으며

장식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리총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달빛아래 봉황대를 보지 못했다.

유교수님이 노래한 달빛에 비친 봉황대의 아름다움을 언제나 볼꼬?

<20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