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영남 알프스 재약산 아래에 위치한 호국성지 - 밀양 표충사

安永岩 2012. 3. 23. 17:37

 

사명대사 호국성지

밀양 표충사(表忠寺)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

 

밀양 표충사는 수도 없이 여러번 간 곳이다.

특히 영남알프스의 재약산 사자평,천황산을 찾을 때는 이 곳 표충사가 산행 들머리가 된다.

그런 연유로 찾게 되지만 산행 때는 표충사를 지나 치든지 그냥 수박 겉 할 듯이 보고 간다.

단지 표충사를 목표로 찾게 된 것은 기억에 별로 없다.

오늘 부처님께 기도를 열심히 할 요량으로 석남사를 거쳐 이곳 표충사에 들린 것이다.

평일(3/14,)이고 겨울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조용히 찬찬히

경내를 돌아 보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표충사는 약 1320여 년 전(서기 654년) 신라 진덕여왕 8년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셨지만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구국을 위한 승병을 진두지휘하고 양성한 호국성지로 더 유명한 사찰이다.

표충사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다.

 

표충사는 우선 넓은 마당에 압도 당한다.

일주문을 들어 서면 1~3단으로 높이를 달리 하면서 엄청난 크기와 넓이에 놀란다.

속이 뻥~뚫리 듯이 시원하다.더 넓은 마당에 그 흔한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다.

마치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이 깨끗하다.

이 넓은 마당,특히 위에도,그 위에도 있는데 말이다.

새벽마다 빗질을 하는 스님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 진다.

 

 

더구나 천황산과  재약산의 파노라마가 병풍처럼 둘러 쳐져 그림같다.

표충사는 크기도 크지만 재약산에서 천황산을 가면서 내려다 보면 양 쪽 계곡 합수지점에

웅장하면서도 포근히 앉아 있는 모습이 참으로 大刹이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느낌이, 임란 때 전국 僧兵를 진두지휘할 만한 곳이였구나 ! 생각에 닿는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유물관이다.

 

 

보이는 당우는 좌측부터 표충서원,表忠祠,유물관이다.표충서원은 지방문화재 제52호이며

사찰 경내에 서원이 있는 경우가 드문데,,,

어째든 유교와 불교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렇다.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표충사(表忠祠)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설법전

표충사당의 맞은편에 위치한 설법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법회를 열어 그 정신을 전승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설법전이란 편액 외에 무설전ㆍ의중당ㆍ대흥불법도량의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四天王門을 올라 부처님계시는 곳으로 다가 간다.

2단 높이에 있는 것은 종무소,만일루,영각,삼성각,그리고 마당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사천왕문을 통과하면서 맞이하는 풍경, 우측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매화나무 꽃망울이 곧 터질듯하다.

 

 

삼층석탑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인 1860년(철종 11)에 월암선사(月庵禪師)가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유풍을 떨치고자
  만일(萬日)의 기도 끝에 이룩한 건물이라 한다.
  192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9년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만일루는 ‘H’자형으로 된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로서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부지에
  불교의 48원(願)을 상징하는 48칸의 선실(禪室)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무량수각(無量壽閣) 또는 서래각(西來閣)으로 편액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종사(曉峰大宗師)가
  말년(末年)을 보내다가 1963년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만일루는 뒷편 동산에 올라 보면 H자형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영각(影閣)

대광전 북서쪽 만일루 옆에 위치한 영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함께 표충사를 빛낸 역대 조사스님들과 중창주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영정은 모두 22점으로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어 있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영정과
  함께 모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웅진전(雄眞殿)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그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인 16나한상을 안치한 법당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인 16나한을 모시고 있어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아라한을 줄인 말인데 존경과 공양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진리에
  도달했다는 뜻에서 응진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으나 모든 고통과 번뇌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성자로서,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의 수기를 받았다.
  따라서 나한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응진전은 주불전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단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으며,
  한분 한분의 모습이 각기 다르고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 있어
  마치 우리네 이웃의 누구라도 닮은 것 같은 모습들이 흥미롭고 친근함을 갖게 한다.
  특히 표충사의 16나한상은 채색하지 않은 점이 독특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다시 한 을 더 올라 서면 부처님 계시는 곳을 만난다.

대광전,팔상전,관음전,명부전,우화루,범종루등이 있다.

즉 표충사의 중심부인 셈이다.

 

대광전大光殿

 

대광전은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법당이란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밝혀서 불멸의 생명, 무한한 행복과 영원한 자유를 이룬 부처님이 계신다. 

 스스로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켜서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눈 멀게 하는 중생을 향해
 무궁무진한 법문의 세계를 펼쳐 놓으신 곳이 바로 법당이다.


 대광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봉 되어온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석가모니불(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함),
 약사여래불(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이며, 손에 약함을 들고 있음),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며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치며 그 광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함)이며,
 이들 부처님은 중생의 염원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봉되어 왔다.


 표충사의 대광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화재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중건, 중수 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조선후기에 중건한 정면 5칸, 측면 3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광전 좌측은 팔상전이다.

 

관음전과 명부전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의 좌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받들어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삼아 중생을 보살피고 도와줄 뿐 아니라,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관세음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괴로움에 처함 중생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그 음성을 듣고,
  인간의 간절한 기원과 요구에 응해 나타나는 구세대비자이기도 하다.
  또한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을 베풀어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르기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큰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모든 악귀도 괴롭힐 수 없다.
  또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을 여의게 하며,
  아들이나 딸을 바라는 이에게는 뜻에 따라 자식을 얻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나투시어 중생을 구제한다.
  관음전은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일면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이 주불전일 때)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관음전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립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탱화가 모셔져 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옥에 계신 어머니를 구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모든 자들이 구원될 때까지
  지옥세계에 계시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죽은 자의 삶을 평가하고 형벌을 정하며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 역할을 하는 시왕(十王)이 계신 전각이다.
  그래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7일째마다 차례로 7번 시왕 앞에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업(罪業)의 경중과 선행· 악행을 심판 받는다고 한다.
  불가에서 49재(四十九齋)를 지내는 까닭도 여기서 연유하며,
  명부전에서 재를 지내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바탕으로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밝혀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우화루(雨花樓)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우화루는 야외참선 장소로 쓰인 곳이며,
  우화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남계천 맑은 물이 발아래 깔린다.

 

범종루

 범종루 종각이라고 불리우는데 이층의 누각인 경우 범종루, 종루라고도 한다.
  표충사의 종루는 대광전을 마주하고 2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범종루라 칭하며,
  범종루에는 불음을 전하는 사물을 배치하고 조석예불, 또는 절의 크고 작은 행사에 울려 퍼지게 한다.
  범종루에는 범종을 비롯해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생의 교화를 상징하는 불구로 예불의식 때 쓰인다.

 

뒷 山은 재약산이다.

그 너머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은 억새평원이 있는데 자그만치125만평이다.

이곳에서 사명대사는 말을 키우고 승병을 훈련했다고 한다.표충사 좌측으로 난 山路를

따라 2시간여 오르면 고사리분교(십수년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가 나오고 재약산을

올라 능선을 타고 천황산까지 억새평원이다.특히 재약산 아래 억새평원이 유명하며

 영남알프스에서 또 다른 억새평원으로 유명한 신불산을 마주한다.

 

 

 

이 넓은 대가람에 관광객들이 별로 없어 정말로 호젖하게 경내를 둘러 보았다.

이제 봄이 오고 매화꽃이 피기시작하면서 부터 가을까지 엄청 붐빌 것이다.

 

우화루 내부 모습

저기 앉아 참선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그러진다.

우리 범인들이야 남계천을 바라 보면서 차나 한잔할 수 있다면~

 

 

 

팔상전八相殿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계단과 웅진전사이에 '영정약수'가 있는데 그 물 맛이 깊다.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

 명약을 찾던 중 황발선인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친히 선사를 찾아와 크게 칭송하나 황발선인이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였다.
 왕은 그말에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키고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하고, 
 사명 또한 영정약수의 이름 따서 영정사라 하였다.
 지금도 이 영정약수를 찾는 발길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 

만일루 와 영각 뒤로 녹색 숲은 대나무 숲이다.

 

나오면서 앞을 본 전경

 

유물관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절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37년)에 사명대사가 강화사절로 일본에 갈 때
  그 호송문제와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포로의 송환문제를 다툰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을 새긴목판, 서산대사의 사적을 새긴 목판, 다라니경목판,
  금강반야바라밀경, 불설아미타경 등과 같은 불경등이 포함되어있다.
  특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과 그 이후 강화사절로서
  사명당의 역할을 살필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효봉대종사사리탑

 

절에서 나와 좌측 길 옆에 있다.

20여년전에는 표충사에 들리면 꼭 여기에 들러 돌로 바위를 치곤했다.

신기하게도 바위에서 목탁소리,종소리가 울렸다.지금은 금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흔적들이 하얗게 남아 있다.

 

 

 

 

 

나무아미타불~

사리탑 뒤에 부도밭 과 소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표충사를 나오면서~

 

※ 각 가람소개는 표충사홈페이지를 참고하였음을 덧 붙인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소원 성취 기도를 하고 선문을 나서니

마음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또 다시 찾기를 기약하면서 길을 떠난다.  
<2012,3,14,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