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여주] CNN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선에 들어간 곳 '신륵사'

安永岩 2012. 6. 23. 21:43

 

남한강 강변 언덕에 자리한 신비로운 고찰

여주  신륵사(神勒寺)

 

다층전탑에서 본 강월헌과 남한강

 

대개 우리나라 사찰은 깊은 산속이나 산 기슭 계곡을 끼고 절집이 자리 하든지

아니면 높은 곳에서 강을 바라보고 위치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 강변에 위치해 있는 절집이다.

따라서 강변의 사계절의 경치가 아름답게 다가 오는 절집이다.

 특히 이 강월헌에서 보는 일출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비롭기까지 하다.

cnn에서 한국에서 가봐야할 아름다운 곳 50선에 신륵사를 선정한 것은

바로 이 강월헌에서 보는 아름다운 풍광 때문였을 것이다.

 

 

신륵사문화단지 주차장에서 10여분을 걸어 들어 오면 매표소와 일주문을 만난다.

십 수년 전에 왔을 때는 이 일주문이 없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세운 일주문이 일주문으로서

역활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즉,사진에서 보듯이 일주문 앞에 키 낮은 나무가 앞을 가리고

들어 서면 길이 아니라 나무를 심어 아예 길을 없에 버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무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들어 간다. 왜?

 절로 들어가는 일주문이니까~ 들어가면서 연신 이상해서 뒤돌아보곤 한다.

왜 그렇을까?

사실 일주문의 위치가 잘못된 듯했다. 강을 통해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륵사라면

우측에 강변을 따라 가는 길에 일주문을 세워 강을 따라 가면서 경내로 자연스럽게

들어 가도록 했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주문을 폐쇄하기 위한 조치 같다.

잘못되었으면 얼른 고쳐야지...외국인도 많이 오는데...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년)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년)에는 보은사라고 불렸다.
그러나 신륵사로 부르게 된 것는 고려 고종 때
이 곳 건너 마을에서 거칠고 사나운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곳의 큰 스님이 신력으로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웠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고려 때는 벽절(寺)이라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 위에 있는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유서가 깊은 만큼 규모도 웅장한 신륵사는

 주변경관 역시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봉미산 입구에서 신륵사까지 가는 등반로가 한적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신륵사는 보물 7개,유형문화재 2개,문화재자료 2개 등

수준 높은 많은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부속 건물로

구룡루, 극락보전.조사당,명부전,신검당,적묵당,봉향각, 산신당,등이 있다.
신륵사는 무엇보다도 강변에 위치한 다층전탑,삼층석탑,강월헌의 정자에서

보는 아름다움이 최고일 것이다.

 

CNN Go는 신륵사의 경치를 ‘깜짝 놀랄만한 경치(breathtaking views)’라고 칭찬하며,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사찰이지만 다양한 석탑과 종, 그리고 느티나무들로

다른 사찰에서 찾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고 설명했다.

신륵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 옆에 나무통로을 만들어 장애인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고

그 너머로 신륵사의 상징 600년된 은행나무와 강변에 다층전탑,강월헌정자가 보인다.

절집은 좌측에 ~ 풍광은 우측 江月軒으로~

 

600년된 은행나무

경내에 600년된 향나무와 함께 신륵사의 상징나무이다.

600년된 나무가 또 있다. 이 은행나무 뒷편 다층전탑가는 길 우측 숲속에

600년된 참나무가 아직도 싱싱하게 푸르게 자라고 있다.

신륵사와 600년~ 무슨관계일까?

600년전이면 1412년인데...

나옹선사께서 이 곳 신륵사에서 입적한 때가 1376년이니

나옹선사(懶翁禪師)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구룡루九龍樓

극락보전과 마주한 구룡루는 여느 사찰과 달리 개방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휴식을 취한다.경내 출입은 구룡루 우측으로 들어 간다.

2010년 극락보전을 대대적인 헤체보수하는동안 이 구룡루를 임시법당으로

부처님을 모셨단다.

 

신륵사의 중심전각인 극락보전 과

(좌)적묵당으로 종무소, (우) 봉향각과 신검당 그리고

가운데 다층석탑과 향나무

 

극락보전極樂寶殿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신륵사의 중심전각이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이다.

뒤로 애트막한 봉미산 소나무 숲에 포근히 안겨 있고, 앞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 내려 가는 풍치 절경에 위치해 있다. 

 

극락보전 마당에 향나무

우측으로 뒤쪽 봉향각의 향나무(법당으로 가지를 뻗어 부처님으로 향했다.),

조사당 향나무(600년)와 함께 신륵사의 대표 나무

 

다층석탑(多層石塔)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보물 제 225호이다.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의 현판이 걸린 九龍樓

다른 사찰과 달리 신륵사의 구룡루는 개방을 하여 일반 관람객들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사방팔방 탁트인 구룡루는 참으로 시원했다.

 

 

옆에서 본 극락보전

2010년도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단다.

 

극락보전의 오래된 기둥모습

자연스레이 흘러 내린 기둥이 세월을 느끼게 한다.

현 극락보전의 건물은 정조 때 1800년에 완공된 전각이다.

 

법당 내부 모습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극락보전 뒤로 삼성각과 봉향각

 

 

법당 앞에서 본 다층석탑과 구룡루

 

멀리 타워크레인의 의미는~~~

강 건편에 호텔이 들어 서고 있다.

현대와 과거의 조화?

그것이 가능할까?

강 건너 호텔에서 이곳으로 보는 풍광은 뛰어 나지만

반대로 신륵사 강월헌에서 보는 풍광은~~~

아마도 현대식 호텔이 ???

모르겠네~ 여러분들의 생각은~

 

 

 

 

 

다층석탑을 유심히 살피는 일행들...

여기 신륵사는 유난히 탑이 많다.

법당 앞에 있는 다층석탑,강월헌가는 길 암반 위에 다층전탑,그리고 강원헌 암반 위에 삼층석탑 등

모두가 역사의 향기가 느껴지는 특색 있는 우수한 문화재들이다.

 

 

극락보전 좌측으로 조사당,명부전,보제존자석종부도로 가는길

넓은 조사당 앞 마당에 나즈막한 향나무가 그림같다.

키 작은 향나무이지만 나이가 600살이시다.

 

조사당

그 뒤로 나옹선사부도가는길

조사당 뒤로 포근히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신륵사를 참으로

아늑하고 편안한 그리고 따스한 절집으로 만들고 있다.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로
보물  제180이다.

 

 

 

 

600년된 향나무

도대체 나무는 얼마나 살까?

양동의 향나무보다 수령은 100년을 더 살았지만

크기는 작으나 인물은 참으로 분재같이 잘 생겼다.

100년도 못사는 우리 인간들이 이 나무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모든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잘 되지 않지만스도~

 

조사당 쪽에서 본 모습

이 향나무는 수고(樹高,지표면에서 나무정상까지 수직거리)는 5m, 나무둘레는 1.3m이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처럼 키가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처진 형태로 꼭 수반의 분재같이 멋스럽게

잘 자랐다. 처진 가지 하나 하나에 받침지주를 세워 돌보는 정성이 느껴진다.

앞으로 더 600년을 위해 잘 자라기를 염원해 본다.

 

 

명부전

 

 

관광객들에게 조사당 앞의 향나무는 단연 인기다.

신륵사의 어느 것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향나무와 강월헌은

아무래도 신륵사에서 으뜸이 아니 겠는가?

 

 

 

조사당 좌측 언덕 위에 있는 부도

즉 원구형석조부조(앞,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와

 팔각원단형석조부도(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써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만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진 것이 없단다.

 

 

지금 조사당 뒤로 계단을 올라 나옹선사부도로 간다.

 

신륵사는 나옹선사(懶翁禪師)와 관계가 깊다.

1376년 57세로 이 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고려 말 나옹선사로 인해서 신륵사가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의 원찰로서

조선초기에 대가람으로 발전한다.

 

참고로 나옹선사의 일대기를 올린다.

 

<신륵사 홈 참조>

 

 

 

나옹선사부도

조사당 뒤로 2~3분 여 올라 서면 소나무 숲 속에 포근히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군의 정식명칭은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석등,그리고 석종비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로써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단다.

 

 

자~ 그럼 하나 하나 살펴 보자~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鍾,나옹선사)

보물 제 228호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懶翁,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이다.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 2년(13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 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단다.

종 모양의 부도는 통도사,금산사,용연사,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종 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 준단다.

부도 뒷편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 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년 (1379)으로 추정하고 있다네요.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石燈)

보물 제 231 호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의미가 있단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화사석은 머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석등의 정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 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石鍾碑)

보물 제 229 호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 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 두었다.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웠으며,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해서체의필치가 돋보인다.

 

해서체 비문

 

 

 

다층전탑으로 가면서 본 신륵사 전경

참고로 신륵사 뒤산은 나즈막하면서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특히 하늘을 

향해 치솟은 소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은 지친 심신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신륵사에 오면 뒷산을 올라 한바퀴 돌아 강월헌까지 가면서 솔향도 맡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풍경도 한번 즐겨 보시기를~~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 (多層塼塔)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가 9.4m이고

보물 제 226호 이다.

 

 

 

 

다층전탑에서 보는 강월헌,삼층석탑,남한강의 경치가 아래 사진 처럼 한폭의 그림이다.

 

 

 

남한강을 굽어 보면서 서 있는 강월헌(江月軒,나옹선사의 당호다)과 삼층석탑

 

강월헌(江月軒)

신륵사란 이름이 생기게 한 정자이다.

즉 고려 말 나옹선사와 한산군 이곡(목은 이색의 부친)이 신륵사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전해 듣고

유람을 왔다가 강월헌에서 바라본 절경이 수려하여 神勒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 강물의 푸르름과

아름다움이 쪽빛 색깔보다 곱고 눈과 어우러진 절벽의 설경이 금강산과 같이 고고하고 오묘하였으며,

절벽의 모양새가 굴레의 그것과 비슷하다 하여 신륵(神勒)이라 하였다고 碑文에 전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 江月軒의 주변 경치가 신륵사라 이름을 낳은 것이다.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로서 장혁이 5000량의 돈을 받고 거래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이며 그 외 드라마,CF에 무수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등장 하는 곳이다.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선사의 당호이다.

정자의 이름을 나옹선사의 당호를 그대로 썼다는 것은

이곳이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거행했던 곳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륵사 삼층석탑

남한강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고

화강암을 깍아 만든 3층석탑으로 마모가 심하여

 탑의 맨 꼭데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가 모두 없어 졌다.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암반에서 본 남한강 모습

예나 지금이나 경치는 같았을까?

 

 

다층전탑에서 본 남한강

 

다층전탑 앞에 구멍뚤린 느티나무와 강월헌 정자

 

 

삼층석탑에서 본 다층전탑 모습

 

 

cnn에서 찍은 겨울 江月軒의 설경

 

아래 사진은 마뉼님과 나(돌바우,안영암)의 기념사진이다.

 

 

 

 

 

남한강 강변 위 2段으로 된 암반 위에 밑에 암반에는 강월헌 정자와 삼층석탑을 세우고

그 위 2段 암반에는 규모도 거대한 다층전탑을 세워 남한강을 한눈에 바라 보도록 지은

先人들의 안목에 깊이 머리가 숙여 진다.

 

 

 

600년된 참나무


600년된 은행나무

 

 


 

신륵사 전경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소개 책자 내용>

 

 

 

 

 

 

일주문의 주련

 

여주 신륵사 주변 강변 정원 과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 끝으로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시를 올립니다.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 我以 無垢 (창공혜요 아이 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 而無憎兮 (료무애 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 我以 無垢 (창공혜요 아이 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 而無 惜兮 (료무노 이무 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2012,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