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고장名所이야기

[포항/죽장] 배롱나무 꽃이 절정인 입암서원 일원 과 선바위(立岩)

安永岩 2013. 8. 22. 15:24

 

선홍빛 백일홍 꽃에 둘러 쌓인 입암서원과 가사천의 선바위(입암)

 

 

입암서원 일원(立岩書院 一圓)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

☞ 소재지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 21외 13필지

 

 

입암서원은 조선시대 지방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여헌 장현광(1554~1637)을 중심으로 

동봉 권극립·우헌 정사상·윤암 손우남·수암 정사진 등을 기리고 있는 서원입니다.

장현광(1554∼1637)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이지요.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맘 때(8월 중순)는 서원과 고택에 붉은 백일홍꽃이 절정이지요

고택과 백일홍 ! 그리고 흰구름이 둥실둥싱 떠 있는  파란 하늘!

누구나 가슴 설레게 하는 풍경이며 그 길을 떠나고 싶어 지지요.

우리고장에 백일홍이 있는 정자는 단연 기북에 있는 홍계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한 양동마을에도 고택에 백일홍이 절정입니다.

 

 

입암서원 솟을 대문

 

 

 

입암서원은 효종 8년(1657)에 처음 세웠으며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지요.

1907년 일제에 의해 묘우가 소실되었으며 1913년과 1974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입안서원의 백일홍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특히 서원안에 솟을 대문 옆에 있는 오래된

백일홍 한그루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네요.

 

 

 

오래된 서원과 백일홍 이라~

지금 제일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요?

 

 

담장 위로 떨어지기 시작하네요

백일홍은 지금이 절정이고 9월초까지 피고 지고 합니다.

 

 

 

 

 일제당

일제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집입니다.

 장광헌,정사신,손우남 등이 학문을 강론하였다지요.

 

 

서원 경내에는 묘우와 강당을 비롯하여 일제당, 만활당 등의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묘우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2월에 제사를 지냅니다.

 

 

 

 

 

 

 

 

 

 

 

 

만활당 

만활당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막돌로 3단의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초석을 놓은 후 동근 기둥을 세운 3량가 홑처마 굴도리집이다.

 

 

 

 

이팝나무 열매도 영글어 가네요

 

 

 

 

 

 솟을 대문 과 백일홍(배롱나무)

백일홍은 꽃이 100동안 피어 있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택이나 서원에 많이 심었지요

 회화나무와 함께 선비나무이지요

 

 

 

 

 

300여년 된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나란히 서서 오래된 세월동안 정답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입암서원을 세운 이곳은 장현광이 잠시 머물던 곳이며

당시 장현광이 심었던 향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서원과 함께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300 여년 된 은행나무

 

 

 

 

 

이 향나무 역시 장선생이 심었다면 400여년이 되지 않았을까요?

다른 은행나무와 달리 이 향나무는 키가 크고 곧게 자랐네요

옆에 있는 은행나무와 동무하고 잘 자라고 잇습니다.

 

동봉 권극립선생유적비를 서원 옆에 새로 세웠네요

 

 

선바위

 

 

서원 앞에 川이 가사천인데

당당하게 위엄있게 서 있는 바위가 바로 선바위입니다.

해서 동네 이름도 立岩里이고요

 

 

 

 

 

가사천

 

 

서원앞에 가사천은 한여름에는 피서 인파로 몸살을 앓는 곳입니다.

지금은 가물어서 물이 얼마 없지만은 물이 많을 때는 수심이 깊어 어른들도 다이빙하며 즐기는 곳입니다.

 

 

 

 1629년에는 노계(蘆溪)박인로(朴仁老)가 와서 '입암가(立岩歌)' 29수와 '立岩別曲'을 남기기도 하였다.

 

 

 

노계 박인로 선생(1561~1642)은 영천출신으로 조선 중기 문인입니다.

 정철,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詩歌人이며 생애 전반에는 무인으로

후반부는 벼슬을 마다 하고 낙향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사셨으며 

당시로써는 기적에 가까운 90세가 넘도록 사시분입니다.

영천 도계서원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2013,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