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고장名所이야기

[구룡포] 300년의 恨이 서려 있는 광남서원이야기

安永岩 2012. 3. 16. 15:24

한편의 드라마이기에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지금도 그 恨이 맺힌 이야기가 남아 있는

광남서원(廣南書院)

 

☞ 위치 :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 전경.마을 뒷편 아담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광남서원은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광남서원은

   조선조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에 희생된 黃甫仁가족사 이야기와 특히 忠婢 여종 단량의 이야기이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흔히 서원은 양반가의 전유물로 감히 노비의 충심을 기리는 碑를 세워 후세에 전하는 서원은 우리나라에

여기 광남서원밖에 없을 것이다.

 

어둠의 역사를 걷어 내고 양지로 나온다. 즉 서원 입구 復陽門 이다.

 

<이야기 하나> 계유정란에 희생된 영의정 황보인

 

   기나긴 세월을 겪는 왕조와 권력의 흥망부침 속에 영고성쇠의 기록을 격은 가문이 한둘일까 마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 仁)의 후손만큼 기구한 사연을 지닌 성씨도 아마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두 자성(復姓) 가운데 재상을 지낸 가문은 오직 皇甫 뿐이라는 것이,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이 지니는 긍지중의 긍지이다.

조선 왕조 단종 1(1452)년에 수양대군의 계략에 의하여 계유정난(癸酉靖亂)이 일어났다

 

 

 

영의정 황보인 비각이 입구 좌측에 있다.

 

영의정충정공 지붕선생신도비

강당인 숭의당(崇義堂)

 

 

 


 


이해 10 10 늦은 밤에, 수양대군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여러 고명(顧命-임금이 후일을 걱정하여 잘 부탁하는 명을 내려 받은)대신을

척살하는 과정에서, 먼저 김종서 아들을 척살하고 , 이어서

영의정을 지낸 황보인(皇甫仁)도 장자와 차자인 두 아들과 장성한 두 손자와 함께

한 가족 다섯 명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멸문의 칼날을 피하여, 바람에 날리고, 깨어져 흩어지듯,

달아나던 황보가(皇甫家)의 엑소더스 중, 황보인의 계집종 단량(丹良)

눈물겨운 의지로 이루어진 출한양기(出漢陽記),

황보씨의 씨족사에 빼놓을수 없는, 한 단면의 기록이다.

 

 

보통 서원은 강단을 정면에 두고 좌,우로 동,서재를 두어 학생들이 기거하도록 하였다.

 

 

안에서 본 복양문 모습

 

 

 

 

 

 

 숭의당 뒤편에 있는  제당인 충종묘(忠定廟)

 

 

사당 옆으로 추원단과 충비 단량의 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 가는 계단

 

 

추원단과 계집종 단량 충비

<이야기 둘> 忠婢 丹良이야기

 

계집종 단량은 이후에 더욱 큰 화가 후손에게 미칠 것을 예측하고 두려워하여, 영의정의 젖 먹이던 어린 손자,

 즉 황보단(皇甫湍)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집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날씨에 갈 길이 막막한 단량은, 황보인의 막내 사위 윤당(尹塘)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닭실 마을까지,

팔백여리를 걸어서 피신해 왔다. 잘못이 밝혀지면 삼족이 멸하게 되는 때인지라, 황보인의 사위 집에서도,

반가워 할 리가 없었으나, 윤당은 역적의 자식이 바깥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새 옷을 해 입히면서, 전전긍긍 하고있던 차,

 생명을 보전하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단량은, 사정사정 하여 노자를 얻어 무작정 도망을 치다가

더 이상 도망 칠 곳이 없는, 동해안 바닷가에 이르러 어렵사리 터를 잡고, 업고 온 황보 단을, 친자식처럼 젖을 먹여 키우니,

그곳이 구룡포읍 대보면, 오늘의 호미곳에서 가까운 집신골이였다.

   후일에 충비(忠婢) 단량은 성인이 된 황보단에게 조상에 대한 슬픈 내력과 그 자초지종을 말하여 주면서

조심해 살 것을 당부하였다. 이곳에서 황보 가문은, 한 계집종의 충성스러운 희생으로,

간신히 맥을 이어 근 300년 동안 은둔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성장한 단(), 가문을 보전하기 위하여, 후손들에게 조상의 사실을 전하고 4대를 숨어살다가

증손 황보억(皇甫億), 뇌성산(212m) 아래 구룡포읍 성동리로 이거해 와 세거지를 이루었다.

 

그후 290년이 흘러 정조 치세 년간에 누명이 풀리니, 황보인은 복권이 되면서 충정공(忠定公)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황보씨의 가문은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되자 지방 유림들과 황보인의 후손들은 정조 15(1791) 장기현 창주리( 구룡포읍 성동3 237번지)

세덕사(世德祠)를 창건하여 수양대군에게 척살당한 황보인과 그 장자 석()과 차자 흠()을 배향하였다.

그때에 빠뜨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계집종이었던 단량(丹良)의 비석도 사우의 뒷마당에 세워 주었다.

한 계집종의 충성됨이 290년 만에 금석문으로 남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출처:네이버백과>

 

내가 어렸을 때 이 지역 황보씨 가족의 수난사을 들어 본적이 있기 때문에 동상이몽이랄까?

황보씨를 다시 보게되었고 우리 安門도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사건에 휘말려 영주 순흥에서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구룡포에 황보씨와 마찬가지로 우리 安門도 그 때 이 곳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되었다.

같은 아픔이 있는 양 가문이라는 사실에 동질감이 많다고나 할까?

내 주변에도 황보씨를 가진 친구가 많다.

귀한 성이지만 왜 유독 구룡포에 황보씨가 많을까?

어릴때 자라면서 품은 의문였다.

 

 

추원당 담장 곁에 쓸쓸히 서 있는 화강암으로 새긴 원래 충비단량의 비

 

 

 

 

   진짜 화강암 비석도 그대로 두고서 후손들이 

오른쪽누각에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다시

잘써서 비각을 세웠다.

 500여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 이지만 지금도 가슴이

찡하게 다가 오네요.


 

낮은 입구가 특이한 추원단(追遠壇)

火를 당한 황보인의 둘째 아들 석,손자 단,증손 억의 碑가 있다.

 

추원단,단량의 비에서 내려 서면서 본 서원전경

 

 

 

서원 건너편 마을과 들,산

 

 

 

서원 바로 옆에 있는 체험관

최근 성동리는 무농약 농사로 쌀을 생산하는데 논에 메뚜기가 많아

가을이면 메뚜기 잡는 체험행사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일명 메뚜기마을이라고 하여 체험관을 운영해오면서 곤충관도 문을 열었다.

또 다른 마을의 변신인 셈이다. 잘 사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떠나면서 돌아 본 마을 전경

 

생각해 본다.그러한 수난사가 없었다면 명문대가로써 권력과 엄청난 富를 가지고

조선왕조 500년 대대손손 번창하였을 것이다.아니 지금도 그 영향으로 더욱 더 번창했을지도

모른다.조선 500년간 한 성씨의 왕국이다보니 오직 왕권을 지킨다는 명분하나로

임금의 형제도 역적이라는 이름하에 처형하는 시대였으니 얼마나 많은 충신들이 꿈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는가?

어느 성씨치고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족사는 없을 것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혹시 저사람이 나를 헤치지지나 않을까? 특히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일 수록

그러한 역모의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곧은 선비는 낙향하여 초야에 묻혀 후진을 양성하면서

글이나 읽고 좋은 벗을 만나 벗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살았나 보다.

 

세월은 변했지만 지금도 우리사회가 죽기 살기로 모략과 비난으로 오직 정권을 잡을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작금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암단한데 그래도 기적같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그래도 잘 흘러 가고 있으니 천만 다행인가 싶다.

실로 걱정되는 현실이다.이것이 양보와 타협이 없다보니 생기는 현상인데

오직 내주장만이 옳다고 여기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극과극,즉 양극만 있지 중도는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중도가 한때는 비굴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이 중도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황보씨 가족 수난사를 보고서 느끼는 소감이다.

2012,3,12,월

<돌바우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