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여행/포항여행]청백리 우재 손중돈선생 享祀 '동강서원東江書院'

安永岩 2016. 2. 1. 00:24

항에 관문격인 兄弟山 중에 弟山 산기슭에 西向으로 앉아 있는 동강서원,

제산 터널을 통과하기 전 200여 미터 지점에서 우측으로 동강서원 표지판을 따라 들어 가다가

제산 바로 아래에서 좌측으로 난 小路를 따라 들어 가면 우측으로 동강서원에 닿는다.

새로 정비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바라보면 제법 높은 곳에 당당하게 위치한 동강서원을 마주한다.

우선 얼마전에 새로 정비한 신도비각을 만난다.

작년에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하여 깨끗해진 동강서원이다.

동강서원은 어떤 서원인가?

바로 우리지역에서 배출한 청백리 우재(愚齋)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우재 손중돈은 누구인가?

이웃한 양동마을에는 조선 500여년의 전통문화를 현대에 이어 가고 있는 대표 두 性氏씨가 있다.

바로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이다. 여강이씨의 대표인물인 회재 이언재선생이 대표인물이며 옥산서원에 향사.

그리고 경주 손씨의 대표인물이 우재 손중돈이며 유명한 양민공 손소의 아들이시다.

양동마을의 관가정이 그의 옛집이다.

 

 

 

동강서원東江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114호

 

이 서원은 조선 숙종 21년(1695)에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을 향사(享祀)하고

학문적 덕을 기리기 위하여 전국 5道 유생이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에 숭덕사,순교당,탁청루,유도문 등이 있었는데 고종 5년에 대부분 헐렸다가

1960년 묘우와 강당,신문 등을 다시 세웠고,1986년에 동제.서재.신도비각을,1999년에 탁청루를 복원하였고

작년에 주변을 정화사업을 다시 하여 지금의 동강서원이 복원되었다.

 

우재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계천군 손소(孫昭)의 아들로 사림파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아래에서 공부하였다.

성종 13년(1482)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경상,충청,전라,함경도 관찰사(현 도지사)를 두루 역임하고  

한성판윤(현 서울시장),도승지(현 대통령비서실장),대사헌,공조,이조판서(현 행정자치부) 등을 거쳤고

특히 도승지 3번,대사헌을 4번 역임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아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서정되었다.

상주목사 시절에는 고을을 잘 다스렸다고하여 주민들이 상주 단밀에 생사당(生祀堂)을 지어 모셨고,

함경사 관찰사로 있을 때는 만세교를 가설하여 주민들이 송덕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동강서원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우재 손중돈선생의 벼슬보다도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업적이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고

소신에 찬 직언의 정치와 淸貧한 삶이 청백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작년에 세계문화유산재단에서 예산이 배정되어

서원 정화사업을 하여 깨끗해졌다.

보이는 신도비각도 이 때 옮겼다.

우리나라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으로는 경주 옥산,동강서원과 안동의 병산서원뿐이다.

당당히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동강서원인 셈이다.

물론 이웃한 양동마을의 영향이 컸을 것이지만스도,

 

 

 

 

 

 

입구 누각인 탁청루(濯淸樓)

최근에 다시 복원한 2층누각이다.

동강서원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면서

이층에서 보는 조망이 좋았을 것이다.지금은 아니지만~

 

 

 

탁청루는

1층은 출입문인 由道門, 2층은 누각인 탁청루

 

 

동재에서 본 탁청루 전경

 

 

강당인 숭교당

 

강당의 구조를 보면 가운데 3칸의 대청을,양 옆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고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여러 행사와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묘우(廟宇)는 얖면 3칸이고 옆면의 통칸으로 풍판(바람을 막는 널판지)을 단 맞배집이다.

 

강당에 걸린 현판

순교당(諄敎堂)

 

 

서재 진성재(盡性齋)

 

여느 서원과 달리 동,서재의 門이 일반문이 아니 꼭 창고문같은 느낌이다.

이유는 뭔지는 몰라도,하여튼 유생들이 기거하기에는 맞지 않은 문 같은데... 

내부를 볼 수가 있었다면 이해가 쉬웠을낀데~

 

 

동재 궁리재(窮理齋)

 

 

탁청루

2층 누마루에서 보는 강동 유금리 들녘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 온다.

 

 

유금리 들녘

저 산 너머에 양동마을이 있다.

 

 

동재 뒤편 모랑지 둔덕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

 

 

활원재와 전사청 영역

그 앞에 배롱나무가 한그루 자라고,

 

 

사당쪽에서 본 고직사,전사청 영역

멀리 붉은 건물의 위덕대학교가 보인다.

 

 

양반나무 베롱나무와 은행나무

 

 

내삼문

사당(숭덕사)을 들어 가는 문이다.

 

 

담장너머로 본 사당(숭덕사)

 

 

 

 

 

동강서원 밖의 복잡한 풍경이 안타깝다.

기차 철로는 그렇다 치드라도 현산강변 옆으로 제산을 통과하는 터널도로가

너무 높아 완전 풍경을 나쁘게 만들어 버렸다.

터널 직선 도로가 새로 생기기 전에는 유유히 흐르는 형산강물이 보이고

그 위로 兄山이 아름답게 다가 오고 평화로운 들녘에 자라는 곡식을 볼 수가 있었다. 

 

 

 

동강서원의 활원재,고직사,전사청,경각 영역

활원재(活原齋)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유숙했던 곳이다.

활원재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을 두어 유생들이 기거하도록 하였다.

나즈막한 弟山의 아름다운 자연도 유생들에겐 아주 좋은 풍경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드넓은 들녘에는 곡식이 자라면서 익어 가고

뒤산에서는 온갖 새소리,바람소리,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자연학습장였을 것이다.

 

 

탁청루를 나서면서~

다시 청백리 우재선생을 생각해 봅니다.

 

 

신도비각과 안내도,그리고 주차장

 

※멀지 않은 곳에 재실 하학재(무화재자료 제355호)와 묘소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또 가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