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경주/경주여행/경주고분여행]신라의 2번째 여왕,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安永岩 2015. 1. 19. 16:18

선덕여왕의 동생,진덕여왕릉이 어디에 있는가?

경주를 제집드나들듯이 하면서 늘 궁금했었다.그리고 갈색의 이정표가 유난히 많은 경주도로변에서

진덕여왕릉을 가르키는 이정표를 볼 수가 없어서 더욱 궁금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진덕여왕릉을 찾아 나셨다.

내차 네비에 진덕여왕릉을 검색하니 놀랍게도 현곡면에 있는게 아닌가?

더구나 오류리라니~생전 처음가는 동네였다.

그렇게 해서 찾은 진덕여왕릉였다.

 

 

경주입구 용강산업단지을 지나 황성공원 앞 도로로 해서 형산강 건너 현곡면으로 갑니다.

금장리에서 우회전하여 오류리로 들어 가는데 산허리를 돌아 한참을 들어 가면

농업용 저수지 아래 진덕여왕릉을 가는 이정표가 초라하게 외롭게 서 있습니다.

 

 

 

500여미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허리를 돌아 오르니 저수지 아래에 5,6대 주차할 수 있는 자그만한 주차장이 또 있네요.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산길로 들어 200여 미터 오르면 바로 신라 28대 진덕여왕릉입니다.

 

 

 

이 이정표에서 200여 미터 솔 숲따라 올라 가면

우측으로 진덕여왕릉이 보입니다.

 

 

 

진덕여왕릉은 제법 높은 안태봉 산꼭데기 솔 숲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꼭 안강 흥덕왕릉의 솔 숲을 보는 듯 합니다.차이라면 흥덕왕릉은 평지고, 진덕여왕릉은 산 중턱입니다.

심산유곡에 외롭게 홀로 계시지만 솔 숲의 아름다움은 어느 왕릉 못지 않게

아늑하면서 자연스러움이 묻어 납니다.

 

 

 

아무렇게나 자란 듯한 소나무 숲을 지나

높은 곳에 고고한 자태로 누워 있는 여왕릉입니다.

다소 쓸쓸히~뚝,홀로 떨어져서 외롭게 있네요

그러한 느낌이 듭니다.

포근한듯 한 릉이지만 시내와 너무 먼 거리로 동 떨어저서...

 

 

 

    경주 진덕여왕릉(慶州 眞德女王陵)

 

사적 제24호

이 능은 신라 28대 진덕여왕(재위647~654)을 모신 곳입니다.

현곡면 오류마을의 뒤편에 있는 안태봉(安胎峰)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2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이다.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김춘추와 김유신이 국력을 기르고 당나라와 적극적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여왕입니다.

 

 

 

 

 

능의 규모는 지름 약 14m, 높이 약 4m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으며,봉분의 둘레에는 둥근 지대석을 설치하였다.

그 위로는 안기둥을 놓고 사이사이에 직사각형의 약간 둥근 면석을 끼웠으며 눈썹돌을 얹어 봉분 아랫부분을 보호하였다.

이 안기둥 면에는 십이지신상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이 무덤과는 정반대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이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릉 뒷편에서 본 모습

좁은 릉에 비해  소나무가 빽빽히 둘러처져 다소 답답한 느낌입니다.

 

 

 

 

 

12지신상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라고 하여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신라 후대에 와서

릉을 세롭게 단장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릉에서 본 앞쪽 모습

 

다소 답답하고 음침한 기운에 스산한 느낌이 듭니다.

홀로 방문하여서 그런지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왕이 혼자 누워 있는 능입니다요

인적이 드문 외로운 여왕릉이라

아니 반겼을까요?

 

 

내려서면서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진평왕)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가까운 남산언저리에 모시지 않았을까?

왜 자매지간을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모셨을까?

의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