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寺刹이야기

[여수여행]호국불교의 성지,여수 흥국사興國寺

安永岩 2016. 6. 1. 02:06

흥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했다.

문화유적을 답사하기 전엔 사전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가야 하는데 흥국사는 영취산 진달래꽃산행에 올인하다 보니

흥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대웅전 문고리를 잡아 보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얼메나 아쉬웠던지...

흥국사 대웅전 문고리를 잡고 소원을 빌면 꼭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여수 호국사찰,흥국사!

그 흥국사에 영취산진달래꽃산행을 하는 길에 들렸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흥국사 대웅전은 대대적인 복원 수리중이다.

문구리를 잡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컸지만 대신 경내를 차분히 한바퀴 돌아 봅니다.

가기가 힘든 절집이 아닌가?

해서 가능한 구석구석을 돌아 봅니다.

  

 

흥국사는 1196(고려 명종 26) 지눌(知訥)이 창건하였으며,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興國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興國寺)라 하였다고 한다.

, 변방의 국찰(國刹),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 불법 그 자체보다는 호국을 우선으로 한 사찰로 창건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려시대의 젊은 학승이 백일기도를 마친 뒤, 기도의 회향축원문(廻向祝願文)에 흥국기원(興國祈願)은 빠뜨리고

성불축원(成佛祝願)만을 넣었다고 하여 이 지방의 향리에게 벌을 받고 다른 절로 쫓겨났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습니.

 

그 뒤 1560(조선 명종 15) 조선 초기부터의 불교 탄압과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화된 것을 법수화상(法守和尙)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기암대사(奇巖大師)가 이 절의 승려 300여 명을 이끌고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으나, 절은 전화로 전소되었다.

그 후 1624(인조 2) 계특대사(戒特大師)가 중건하였고, 1690(숙종 16)에 통일(通日)이 대웅전·팔상전 등을 중건하였다.

1760년경에는 17() 14(), 총건평 624평에 승려 643명이 상주하던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면모를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396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1645년에 건립한 팔상전(八相殿)과 불조전(佛祖殿),순조 때 건립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원통전(圓通殿), 그 밖에 응진전·무사전(無私殿)·첨성각(瞻星閣)·적묵당(寂默堂)·심검당(尋劒堂)·노전(爐殿)·백련사(白蓮舍)·법왕문(法王門)·봉황루(鳳凰樓)·천왕문(天王門)·영성문(迎聖門) 15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다음백과사전 참조>

따라서 여수 흥국사는 護國 佛敎의 성지입니다.

임진왜란 때 여수 진남관과 함께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부가 있었던 곳입니다.

조선 말기까지 승군이 함께 하면서 전란에 나서 공을 세우고 평시에는 사찰 건립과 복원에 나서기도 하였답니다.

또한 흥국사는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8호로 보물(8)과 문화재가 많은 절집입니다.

 

 

흥국사 가는 길

 

좌측은 영취산 산행길이고 흥국사는 우측으로 갑니다.

흥국사는 일주문을 지나 이 곳까지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길 가장자리로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편안한 숲길로

아주 운치가 있으며 또한 벚꽃길로 유명합니다.

 

 

아름드리 벚나무

진달래꽃축제가 끝난 흥국사는 산꾼보다도 일반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흥국사 앞 계곡

 

흥국사 주변은 영취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소리와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

그 속에서 울어 대는 새소리로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한 완연한 봄기운에 기분이 저절로 좋아 집니다.

제가 일년 중 가장 좋아 하는 계절의 풍경이 바로 지금입니다.

연두빛 새싹 돋는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합니다.

신비로운 새 생명의 탄생,온갖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옵니다.

 

 

영취교와 천왕문

이제 호국불교의 성지,흥국사로 들어 갑니다.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바로 영취산 최고봉,진례봉(510)입니다.

 

 

 

4대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저를 반깁니다.

하지만 흥국사의 4대천왕은 표정이 무섭기 보다는 익살스럽고 부드럽네요~ㅎ

 

 

 

 

 

 

 

法王門

천왕문을 통과하면 봉황루를 지나 우측으로 돌아 가면 법왕문이 높게 위엄있게 서 있습니다.

누각(봉황루)과 법당(대웅전)사이 마당 중앙에 놓인 법왕문은 보통 사찰엔 없는 특이한 배치입니다.

아마도 법왕문의 중수기록현판이 있는 것을 보면 흥국사의 중창의 근거로 법왕문이 건립된 듯 합니다.

내부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고 다만 절에 필요한 소품들이 놓여 있네요

 

 

부처님 세계로 들어 가는 문입니다.

법왕문 역시 새로 복원한 흔적이 있는 당우입니다.

 

복원 전 鳳凰樓

 

복원 후 봉황루

 

흥국사의 봉황루 건물은 아주 역사성이 깊은 건물입니다.

보통 사찰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 하는 누각이며 큰 행사에 사용되는 흔히 말하는 강당인 셈입니다.

이 흥국사는 조선 중기에서 말기까지 수군 승병이 주둔한 호국사찰였지요

승병이 많았을 때는 300명도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합니다.

그 수군 승병들이 주로 기거한 곳이 봉황루였다고 합니다.

임란으로 전소되기 전엔 정면 7칸으로 아주 컸다고 하네요.

승병은 조선 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흥국사 대웅전(보물 제396호)

1624년(인조 2년) 계특대사가 절을 다시 세울 때 지은 건물로 석가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법당입니다.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1693(숙종 19)에 천신(天信)과 의천(義天)이 제작한 것으로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하였지만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고 지금의 당우들은 그 이후에 세워진 건물들입니다.

현재 다시 복원중입니다.

 

 

복원 전 흥국사 대웅전 모습

첫눈에도 안정감있고 아주 잘 생긴 대웅전입니다.

.

 

대웅전 옆 적묵당

돌아 가면 임시법당이 있습니다.

보이는 산이 영취산 최고봉 진례봉(510)입니다.

즉 흥국사는 여수의 진산,영취산의 정상 서쪽 아래 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한 절집입니다.

영취산은 우리나라 진달래꽃 4대 명산에 드는 산입니다. 

 

대웅전 앞에 있는 범종각(동종은 보물 제1556호)

흰코끼리와 법고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낀데...무슨 의미?

수백년동안 법고를 지고 선 코끼리가 힘들지 않을까?

 

복원중인 대웅전은 다소 어수선합니다.

흥국사 석등

거북이 등위에 불을 켜고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모습의 이 석등은 대웅전을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한 형상물입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나는 석등입니다.

 

복원 전 대웅전 기둥과 문

 

복원중인 대웅전을 살짝 안을 들여다 봅니다.

유명한 대웅전의 문고리도 보이고...아직은 완전 해체 전이라서 비교적 옛 건물이 그대로 있네요

출입금지라서 그저 바라만 보고 왔네요. 잠시 아주 조용히 들어 가서 문고리도 잡아 보고 뒷벽면에 백의관음도도 친견할 수가 있었을낀데...

마음이 착해서~하지말라는 것은 못하는 성질이라서~ㅎ

여기에 수월백의관음도 사진이라도 올립니다.

보물 이랍니다.

 

 

백의수월관음도

보물 제1332호

 

흥국사는 유명한 기도처입니다.

 흥국사에 오면 대웅전 문고리를 잡아보고, 백의관음도를 보고

원통전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참배하여야 한답니다.   

 

 

빛 바랜 대웅전 門

 

 

 

무사전無私殿(지장전)

 

대웅전 곁에는 무사전이 있습니다.

다른 사찰의 경우에는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이라 불리는 전각이다.

흥국사에서는 이를 무사전이라 현판하고 있다.

 

 

무사전은

개인의 이유나 사정에 의해서 사후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에 의해 과보를 받으므로 무사(無私)라고 했다고 합니다.

 

내부의 모습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고 있는 흥국사 무사전의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신이 협시하고 있다.

 

 

 

목조지장보살삼존불 과 시왕상 일괄 및 복장유물은 보물 제156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648년(인조26년)에 12명의 조각승이 조각하였답니다.

 

가만히 여유를 갖고 살펴보면 표정 하나 하나가 재밌고

조각술도 뛰어 나고 갖가지색으로 단장한 복장도 볼거리입니다. 

 

 

무사전 지나 팔상전으로 가기전 우측에 있는 공양간 옥상에 장독들...

 

 

밖에서 본 대웅전 뒤편에는 불조전, 팔상전, 응진전이 있다.

팔상전 가는 길에 기와담장과 돌담이 정겹다. 

 

 

 

불조전은 흥국사와 관계된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입니.

1630년에 청파대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1820년에 침용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지금의 건물은 1935년 춘봉대사가 청운암에서

이건해 현 위치에 건립한 건물입니.

 

 

당장과 덩굴식물

 

불조전지나 팔상전 가는 계단길

 

 

 

段을 높여 가며 조성된 돌계단과 좌측의 오래된 돌담이 참으로 친근감이 있고

마음을 한없이푸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입니다.

활짝 열어 놓은 자그만한 팔상전 일주문도 멋스럽고~

 

 

팔상전(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58호)

석가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八相殿이라고 하지요

 

 

 

 

 

팔상전 옆에 있는 응진당應眞堂(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

뒷산은 영취산의 최고봉,진례봉(510m)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며, 좌협시는 관세음보살이고 우협시는 대세지보살,

소조 16나한상이 전면에 6개, 좌우의 벽 쪽에 각기 5개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뒷벽에 있는 십육나한도보물 제1333

 

 

팔상전에서 본 복원중인 대웅전 가설물들...

좀 늦더라도 옛 것을 그대로 살린 대웅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팔상전과 풍경들...

 

 

 

그리고 밖에서 본 흥국사 현재 모습

 

영취산 진례봉과 흥국사,우측에 우뚝 선 팔상전이 날렵합니다.

 

 

흥국사 경내에 있는 노거수들...

 

 

유물전시관 곁에는 마음의 근심을 푼다는 해우소가 위치하고 있습니.

노거수가 있는 해우소 풍경이 좋습니다.수령이 100여년을 넘었다는 보리수나무 고목은 이끼가 뒤덮고 있네요.

 

 

좀 높은 곳에 있는 임시 대웅전

흥국사는 과거의 거찰답게 제법 너른 터를 갖고 있습니다.

 

 

원통전가는길,영취산으로도 갑니다.

 

 

원통전 앞에 있는 만월당(滿月堂)요사채

원통전은 이 요사채와 마주 보고 있는데 주변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흥국사 원통전(시도유형문화재45호)

흥국사에서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원통전은 주변의 풍경이 어울러서 궁궐의 정원같은 느낌입니다.

원통전의 또 다른 멋은 전각의 구조입니다.

 

 

 

 

 

흥국사를 찾은 많은 기도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원통전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이십니다.

 

 

옆에서 본 원통전 모습

 

 

의승수군유물전시관(義僧水軍遺物展示館)

 

의승수군(義僧水軍)과 관련된 자료는 현재 흥국사 승병수군유물전시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임란 당시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칼, 창, 철퇴 등의 무기와 승복 등 20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이 가운데 공북루(拱北樓) 현판은 충무공이 직접 썼다고 전한다. 공북루는 북쪽 성문으로 ‘임금이 북쪽에 있으므로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충무공은 수시로 흥국사 공북루를 찾아 승군을 훈련시켰다.

성문이 사찰의 일주문처럼 있었다는 것은 흥국사가 의승수군의 군사체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임란 초기, 왜적의 기세는 등등했다.

순식간에 경상, 충청, 경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호남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며 결의를 다졌다.

당시 나라를 지킨 호남의 중심에 여수 흥국사가 있다.

임란이후 300년에 걸쳐 전라좌수영 산하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영이던 주진사(駐鎭寺)이다.

또한 전라좌수영에 가까이 있으면서 작전이 많이 전개된 광양만으로 통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영화 ‘명량’의 전투신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배 위에서 스님들이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이들이 바로 ‘호국(護國)이 곧 호법(護法)’임을 강조하고 분연히 나선 의승수군(義僧水軍)이다.

의승수군은 충무공이 조직했다. 충무공은 임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8~9월경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승려들도 전투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충무공의 장계에 따르면 당시 스님들이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한 달만에 400여명이 모였다.

충무공은 의승수군을 관군아래에 두지 않고 승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출가사문임을 고려한 것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철저하게 이러한 지휘체계를 지키도록 했다.

...중략

[불교신문3038호]

 

- 흥국사가 왜 호국의 성지인지를 잘 나타낸 불교신문의 내용입니다.

 

 

절집 뒤로 놓인 아치다리

그 아래로 영취산 계곡물이 콸콸~이다.

영취산으로 가는 다리이다.

 

영취산계곡

 

절집 뒤 돌탑들...

영취산은 엄청난 바위,돌산이다.

돌이 지천이다 보니 이런 돌탑들이 수백개가 넘는다.

지금도 돌탑쌓기는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풍경인 셈이다.

 

 

 

 

 

 

 

비록 수량은 적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풍경입니다.

봄이 오고 있는 흥국사입니다.

 

한대밖에 없었는데...

흥국사 주차장

원래 주차장은 일주문 아래 큰 주차장이 여러 군데 있고 여긴 신도 차량만 들어 오는 곳입니다.

 

 

흥국사의 봄

 

 

참고로 '흥국사 홍교'를

시간 관계상 차로 지나 가면서 먼 발치에서 보았는데

아주 걸작였습니다.

해서 이웃블로그님에게서 겨울의 裸身 홍교를 올립니다.

보물 제 563호랍니다.

 

흥국사 홍교 1639년계특대사가 축조한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홍예석교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네요.

흥국사에 갈 땐 꼭 보세요. 일주문 아래 주차장 옆에 있답니다.

 

흥국사 일주문

오후 시간인데도 엄청 몰려 들고 있는 산꾼들과 관람객들...

과연 호국불교의 성지,흥국사입니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