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답사기

[영월여행]조선 제6대 단종의 능,장릉(莊陵)

安永岩 2015. 7. 8. 16:19

청령포에 이어서 車로 5분거리에 있는 장릉에 들렸습니다.

영월은 단종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많은 고장입니다.매월 4월에 단종문화재가 성대히 열릴 만큼

단종을 추모하는 행사가 많습니다.

특히 단종문화재의 백미는 단종의 국상행렬 재현이지요.

조선 27명의 왕 중에 유일하게 국상을 치르지 못한 임금였기에 현대에 와서 國喪을 재현한다는 것은

못다 핀 단종의 한을 달래고 단종을 추모하는 행사이지요.

죽어서 영원히 사는 삶을 이어 가는 단종입니다.

오래 전에 참배 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보다는 많이 성역화되었네요.

특히 단종의 능을 깨끗히 단장을 하였네요.

제 기억으론 단종의 능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들이 일제히 능를 향해 읍해 있는 듯이 서 있었는데

능을 성역화하면서 많이 제거가 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깨끗이 단장된 것 같습니다.

  

 

장릉(莊陵) 조선 제6대 단종의 능

사적 제 196호

 

단종(端宗,1441~1457,재위 1452~1455)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휴유증으로 출산 후 하루 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단종3)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이듬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 갔고,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해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1516년(중종 11) 장릉은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1698년(숙종 24)에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고,묘호를 단종,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현지 안내문 참조>

 

 

장릉주차장과 매표소

 

뒤편 우거진 숲이 장릉가는 길입니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만나는 단종역사관 우측으로 단종의 릉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아래 단종릉 안내도를 참조하세요

 

 

 

여느 조선왕릉 보다도 장소가 협소한 탓일까?

구조가 좀 특이합니다.

통상적으로 조선왕릉은 一字형으로 정자각외 여러 부속 건물과 신도가 끝나는 지점 맨끝 높은 곳에 능이 있다.

단종의 능은 홀로 외롭게 높은 산 위에 있고 그 아래 여러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구조이다.

 

특히 홍살문에서 정자각(능 제향을 올리는 丁자 모양으로 지은집,제향을 오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으로

이어지는 참도(左 신의 길인 신도,右는 임금이 다니는 어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영월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이는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입니다.

 

아마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을때 어느 누가 감히 시신을 거두었을까?

이 지역 충신 엄홍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곳이 여기였을 것이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중종 11년(1516)에 암장지를 찾아 비로서 봉분을 갖추었다고 하니

이 정도의 규모로 능을 조성하였음에 오히려 다행인 생각이 듭니다. 

일설에 엄씨문중 산였을 것이라고 하네요.

 

우리 일행들은 단종역사관 옆으로 난 계단길로 바로 능으로 갑니다.

단종의 능을 먼저 참배하는 것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내려 오는 길에 보면 되지요.

     

 

 

단종의 릉으로 오르는 숲길은 참으로 아늑합니다.

오래된 소나무가 여전히 우리를 반깁니다.

 

 

 

 

얼마 오르지 않아 바람 시원한 단종의 릉이 보입니다.

이 지점에 벤치가 있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 갑니다.

아니 참배 전에 정신을 좀 가라 앉힌다고 하는게 맞겠지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릉에 천천히 오릅니다.

예전에는 좌측편에도 소나무가 빽빽했었는데...좀 답답한 느낌은 들었지만,

그 소나무들이 일제히 릉을 향해 읍하고 서있었지요.

그래도 입구에 일부 소나무가 능을 향해 절하고 서 있네요.

 

 

 

성역화된 능 주변이 시원스럽기는 하네요

원래 산소 앞은 탁~트이게 한다고 하지요.

그런 개념에서 보면 나무들을 옮기는게 맞기는 합니다.

단종의 릉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 있는 우리 회원들...

 

 

단종의 릉

 

잘 단장이 되었네요.

여기부터는 능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습니다.

한 눈에도 아주 협소한 왕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서 시원한 느낌을 주고 경치도 빼어납니다.

단종의 릉에는 왕릉의 상징인 병풍석도 무인석도 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친근함이 묻어 납니다.

칼에 무너진 어린 임금였는데 칼을 든 무인석을 혹 ~일부러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능 주위에 세워진 석물(石物)의 수가 적습니다.

보통 왕릉 주위로는 다양한 종류의 석물이 두 쌍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장릉에선 봉분 앞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을 중심으로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그리고 석마(石馬)만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해 있을 뿐입니다.


 

앞을 봅니다.

시원한 풍광이지요.다행이라 생각해봅니다.

한많은 사연을 안고 가신 님의 답답함을 잊으라고 이런 시원한 풍광을 주었나? 싶네요

일반 산의 평범한 구릉지에 묻힌 장릉이지만 크고 화려한  여느 왕릉보다도 찾는 이는 많습니다.

영월은 단종의 넋이 머물고 있는 도시입니다.누구라도 영월을 방문하면 반드시 방문하게 되지요.

죽어서 오래 기억되는 임금입니다.

 

   

 

오늘도 모처럼 하늘이 좋은날,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오네요.다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참배를 할까요?

또 우리 어린자식,손자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까요?

참으로 난감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예전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우측에는 나무들로 빽빽했었는데...이렇게 시원하게 정리를 하였네요.

언덕 아래에는 재향공간인 정자각외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여각,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비각,재실,역사관등이 있습니다. 

 

원래 능침(와과 왕비의 봉분) 앞에 있어야 하지만 보시다시피 장소가 너무 협소하고 좌우가 급경사지라서

한참 아래에 정자각을 세웠는데 정면이 아닌 옆구리로 절을 해야 하는 이상한 구도가 되었습니다.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30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지요.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募)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습니다.

그리하여 42기 릉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내책자인용>

 

 

 

 

참도와 정자각

 

참도(參道):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한다.

장릉의 참도는 'ㄱ'자형으로 된 특이한 구조가 바로 이것이지요.

 

정자각(丁字閣):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즉 재향공간입니다.

여기도 여느 능과 달리 정면이 아닌 사진에서 보다시피 옆구리를 올려다 보고 절을 해야 하는 형국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마음과 정성이 통하면 되지 싶네요.

 

 

충신 엄홍도 정여각

 

단종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엄흥도와 박충원입니다.

엄흥도는 자신과 집안 식구들의 안위를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고,

박충원은 후일 그의 묘역을 찾아서 장릉이 만들어 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엄홍도 정여각 앞에 설치된 홍살문

 

홍살문(紅箭門) :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홍문(紅門)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단종임금은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

이때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는데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추상같은 어명에도 불구하고 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암장한 이는 영월호장(戶長) 엄홍도였지요.

지금 같으면 몰라도 임금의 말 한마디로 죽는 세상에서 대한한 용기였네요. 

 

노루가 있던 자리에 암장한 단종의 능

 

 
눈이 펑펑 내리는 음력 시월 그믐 어느 추운 날,

호장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길을 오르는데

노루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보더니 훌쩍 자리를 떴는데

그 자리만 온기가 남아 임금님의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답니다.

그 자리가 지금의 장릉입니다.

그 후로 엄홍도는 벼슬을 버리고 아들을 데리고 영월을 떠나 은신,

숨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낙촌 박충원입니다.

낙촌비각駱村碑閣

 

매표소를 통과하면 우측으로 왕릉으로 가는길 옆에 있습니다.

엄홍도 정여각과 함께 꼭 참배를 하여야 하는 공간입니다.

 

 



 

 

 

영월군수였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입니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 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 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3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 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 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낙촌 박충원은 1531년 중종 2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 시호를 받았다.

 

 

 

제법 너른 평지에 성역화 된 장릉입니다.

일부회원들 단종역사관을 관람하려 간 새에 잠시 앉아서 머리를 식힙니다.

그리고 생각에 젖어 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왕조사회에서는 피비릿내 나는 죽임이 계속되었을까?

왕이 그랬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한마디로 권력,그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왕을 둘러 싸고 있던 대신들 때문입니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살고자 했던 대신들이 역사의 죄인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을 보면 똑 같은 형국입니다.

내가 살고자 남을 죽여야 하는 세상...

언제나 그런 세상이 끝날까요?

진정 함께 더불어 사는 그런 세상은 없는 걸까요?

...

착찹한 심정입니다.

-영암생각